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어제의 댓글 말미에서 그만 혼자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좋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찾아보았다.



이통통신 3사 "인하 어렵고, 무료도 안 된다"

시민단체의 CID 요금인하 요구에 대해 이동통신 3사는 이동통신 기본료와 음성통화 요금이 해마다 인하되고 있는 상황에서 품목에 따라 최근 2∼3년 간 수백 억 원을 투자한 부가서비스 요금까지 내릴 경우 경쟁력이 크게 약화된다며 적극 반발하고 있다.

특히 KTF와 LGT는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요금 무료는 물론 인하도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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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시장지배적 사업자인 SK텔레콤은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SK텔레콤의 한 관계자는 "당정협의를 통해 정통부가 요금 인하 방침을 밝히고 있고, 우리쪽에도 요금인하 검토를 요구해와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입장이 나온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SK텔레콤측도 CID요금 인하나 무료화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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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계자는 "시민단체에서 외국의 사례를 들면서 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서 "외국에서 CID요금을 무료화할지 몰라도 우리가 무료화하고 있는 부가서비스를 유료화하는 등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SK텔레콤은 현재 47종의 부가서비스 가운데 약 20종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NTT 도코모의 경우 국내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유료로 서비스하는 것이 상당수라는 설명이다.




"원가는 한달에 100원인데 2500원이 넘는 돈을 받는 건 가입자를 등쳐먹는 행위"(참여연대 논평)
2005년 10월 20일 / SKT, 내년부터 발신자표시 무료화 / issue-i

SKT가 18일 내년 1월부터 발신자번호표시(CID) 서비스를 무료화 한다고 발표했다. 그 동안 CID 무료화 및 SMS 요금 인하를 주장해 온 소비자 단체들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한 덕분으로 보인다.

요점은 발신자 번호 표시 무료 혹은 인하는 불가능하다 -> 무료화 해라 -> 무료화 하겠다
물론 부가 서비스에 불과한 것이고, 소비자로부터 시작된 경우라는 차이는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두가 '어? 이거 왜 2~3000원 다 받아?' 했던가? 어떤 이가 '이거 왜 이렇게 비싸?'라고 문제를 제기했고, 다른이들이 '어? 생각해보니 그러네?', 이렇게 차츰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결국 무료화된 것이다.

앞서, 내가 생각하는 스타벅스 문제의 논점이라는 글에서 지적했듯이, 초점은 수요자들의 소비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스타벅스의 가격이 되어야 한다. 뉴스와 신문의 문제 제기로 가격 문제가 이슈가 될 수 있었음에도,
  1. 우선 개념 없는 이들의 스타벅스를 마시는 이들(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욕하기,
  2. 당연히 화가 날 만한 소비자들의 '남의 기호에 간섭하지 말아라',
  3. '그럼 소비자들은 가격에 만족하는 것인가?'
  4. '그래 만족한다. 비소비자는 간섭하지 말아라.'

이렇게 차츰 감정적이고 초점이 흐려져간다고 생각한다(물론. 어제의 글에 이어진 댓글들에서 늘푸른님과 Nera님이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다. 네번째 문제에서 가격 문제 자체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의견을 밝히셨으므로). 아니라고? 지금 올블로그에서 스타벅스를 쳐서 최근 글들을 살펴보시라. 비소비자 모두가 마시는 이들을 표적으로 비난한 게 아닌데 왜 남이 마시는 걸 간섭하느냐는 글들이 주로 나오고 있다.

내가 아쉬운 건, 비록 비소비자들이 주로 시작한 건 사실일 수 있지만 '발신자 표시 무료화'건처럼 소비자들 또한 문제를 인식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진전될 수도 있었던 토론이 처음 개념없는 이들의 인신 공격으로 인해 점점 탁해지더니, 결국 비소비자가 제시하는 글들은 싸그리 '반미주의자들의 글'이나 '2580이나 한 번 보고 시류에 영합해서 한마디씩 던지는 간섭'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곁에서 대충 보는 이들은 그러게 왜 남한테 간섭해~ 라고 말하고.

내가 아는 스타벅스를 즐겨찾는 이는 '좋아서 마시기는 하는데, 좀 비싸'단다. 우리는 가격에 별 불만 없다며, 원천적으로 가능성을 차단하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럼 가격에 불만 있었지만 할 수 없이 마시던 소비자들은? 아무튼 처음 시작한 개념없는 인신 공격 악플들이 문제는 문제다.

'지금껏 그런 경우가 없다', '비소비자가 뭐라 해봤자 소모적인 논쟁만 될거다'라는 말들은 수긍하기가 힘들다. '다모'의 명대사가 아니더라도, 길이 처음부터 길이던가? 여러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다져지니 길이 된거지. 왜 스타벅스만 뭐라 하냐고? TV에서도 터졌겠다, 외국 기업에서 스타벅스 문제가 선례가 되어주면 안되는 걸까? 마시는 당사자들도 이익인데.

ps. 중국의 스타벅스 가격 문제도 그렇다. 北京故事님의 글에 따르면 대략 이 정도인 듯 하다(스타벅스 가격이 논란이 되고 있군요). 어제 댓글에서는 또다른 곁가지로 확대되어 논점이 흐려질까봐 말았지만, 중국 역시 北京故事님의 말씀을 빌어도 체감상 비싸게 느낄 것 같다는 의견이다. 스타벅스의 가격 문제는 아마도 아시아가 문제인 것 같은데. 그럼 중국 가격 문제는 중국 소비자들이 주장할 문제 아닐까. 물가 대비 가격이 1등만 아니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는 건 아니지 않은가. 비판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우리 뒤에는 중국이 있으니까 중국보다만 싸면 돼'라는 전제로 비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솔직히 나도 괜히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토론을 즐기지도 않고 토론을 잘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몇몇 악플러들 때문에 발단부터 흐려지는 걸 보면서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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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난 20대 남성이고 스타벅스 커피 마셔보니 맛있던데, 하하. 하지만, 비싸서 누가 사줄 때만 먹는다. 물론 난 담배는 피지 않고. 오히려 난 스타벅스 커피를 사서 마시는 것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별 생각 없었지만, 담배에 관해서는 악감정이 많은 남자 중의 하나다.

스타벅스 문제는 스타벅스를 마시는 이를 욕한다기보다 스타벅스가 비싸다는 것이 문제 아닌가? 물론 마시는 이들을 욕하는 포털의 댓글들은 무시하고. 그럼 단순히 비싸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한국에서 유난히 비싸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고가 정책 문제를 가지고 삼성 핸드폰이나 BMW, 가전 제품들과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제품들이 한국에서 유독 비싼 것인가? 삼성 핸드폰이 한국에서만 고가 정책을 쓰고 외국에서는 저가 공습을 펼칠까? 유독 스타벅스만 가지고 물고 늘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패밀리 레스토랑 역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패밀리 레스토랑 역시 한국이 유독 비싸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타벅스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20,30대 남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주 고객층이 여자들이다 보니, 어제 2580이나 신문을 통해 스타벅스 문제를 접한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향해 욕을 하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같은 남자로서 사실 부끄럽다. 하지만, 남녀 문제로써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 역시 반대다. 그럼 고가의 삼성 핸드폰이나 외제 자동차, 가전 제품은 남성들만 선호하는가? 그럼 여성들의 비싼 향수에 외제 상표 옷은? 이렇게 성별로 접근하는 건 난타전으로 갈 뿐인 듯 하다. 나 역시 항상 문제를 접근할 때 다짐하는 바이지만 성급한 일반화는 곤란하다. 앞서 밝혔다시피 나처럼 스타벅스를 마시는 여자들에 그리 반감을 가지지 않는 남자들도 있고, 스타벅스에 단순한 반감을 가진 여자들도 있으며 스타벅스의 가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다.

요점은, 스타벅스가 유난히 한국에서만 비싸다는 것이 논쟁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링크한 두번째 글의 여름하늘님께서 적으신 것처럼 우리는 스타벅스 경영진이 아니라, 고객이다. 스타벅스의 고가정책이 왜 성공하는가는 스타벅스 경영진과 경쟁 기업, 그리고 경영을 전공하는 이들이 연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 사이에 왜 유독 스타벅스가 한국에서만 비싼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결국 가격이 내려갈 수 있다면, 마시는 이들도 좋은 것 아닌가? 초점이 흐려지고 점점 감정적이 되거나 논점이 왜곡되어 결국 다른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 묻혀지는 것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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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신문을 보는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거의 안보고 살지만 좀 어린 시절, 거의 몇 달 동안 여러 신문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동시에 볼 기회가 있었다.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일이었지만, 원한다면 매일매일 똑같은 기사를 십수 종류의 신문을 통해 읽을 수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알아보자 하는 마음에 여러 신문들을 훑었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안좋게 말하는 이들의 의견만 보고 들은지라 조선일보에 단순한 거부감 정도만 있었다. 말하자면 나도 단지 맹목적으로 조선일보가 싫었던 철부지 안티 중 하나였다. 그러던 나에게 몇달의 신문 읽기 중에 아직도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는 건, 조선일보와 한겨레 신문의 각지의 1면 톱기사를 비교해봐도 거의 단어하나 틀리지 않는 분명 똑같은 사건들이 사설면에만 가면 서로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각 신문의 기사들만 읽어보고, 미숙하지만 나름대로 내 생각을 정리한 다음 조선일보와 한겨레 신문의 사설을 읽었다. 대체적으로 내 생각은 조선일보보다는 한겨레 신문 쪽에 가까웠다. 그런 일을 한동안 하다가, 결국 나는 조선일보는 읽는 것을 관두었다. '신문을 통해 세상을 좀더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내 철없는 목표는 실패로 끝났다. '신문은 사람들을 세뇌하기 딱 좋은 도구이다.'라는 결론만 얻게 되었다.

어제 정말 멋진 분의 글을 읽게 되었다. '조선일보 헤까닥 술이 덜 깬겨?'라는 글인데,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자체가 맘에 들거나 비판 내용에 탄복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태도와 자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렇구나. 무엇인가를 비판하려면 이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조선일보를 싫어하고 비판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조선일보에 관심(?)이 있는 분의 블로그를 본 것은 이번이 두번 째이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블로그도 많겠지만, 내가 본 한에서.

라디오에서 순진[각주:1]과 순수[각주:2]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리컵이 있는데, 유리컵이 텅 비어 있다면 순진한 것이고, 유리컵 안에 아주 맑고 깨끗한 물이 가득차 있다면 순수한 것이라고. 어떤 대상을 비판하는 것도 이 순진과 순수의 원리와 같지 않을까. 대상을 혐오하고 접근 자체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비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무엇 혹은 누군가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혹은 그사람)을 비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태도는 비판이 아니라 비난, 혹은 단순히 개인적인 혐오일 뿐이다. 그런 비난과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려 해서는 안되며, 다른 이들이 결코 설득당하지도 않는다.

우연히 본 글에서 좋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 마음이 꾸밈이 없이 순박하고 참됨. [본문으로]
  2. 잡것의 섞임이 없는 것.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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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죄다'라는 골빈해커님의 글을 뒤늦게 읽게 되었다. 글 내용도 짧고 그냥 개인적인 단상 형식으로 쓰신 듯 해서 그냥 읽고 지나칠까 했지만, '단언컨데'라는 단어가 조금 맘에 걸려 글을 써본다.

맞다. 노력도 하지 않고 결과를 바라는 경우 '가난은 죄다'라는 말이 맞다. 하지만, 이런 경우들은 어떨까.

  1. A라는 남자는 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수술비를 대면서 두 명의 어린 동생을 양육해야 한다. 게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자살하면서 유산으로 남긴 10년 동안 갚아도 모자랄 만큼의 빚을 갚아나가야 한다.
  2. B라는 남자는 철없던 시절 단 한번의 치명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 정신을 차린 그는 겜방 알바라도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전과가 있는 그를 아무도 써주려 하지 않는다.
  3. C라는 여자는 겜방 알바를 하던 중, 전부터 추근대던 겜방 알바 사장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 그녀는 다시 일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지만,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남자들만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직장을 유지할 수가 없다.
  4. D라는 남자는 두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다. 10년 전엔 '이정도 돈이면 집을 사서 우리 가족 행복할 수 있겠지.'라며 열심히 일했건만, 10년이 지난 지금 집값은 배나 뛰어 장만할 수나 있을지 고민이다. 그런 그가 만난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아버지가 부자였던 친구 녀석은 아버지의 돈을 잘 굴려 미국에도 별장을 몇 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위의 경우들은 물론 꾸며낸 상황이긴 하지만, 있을 법도 한 경우들이다. 주위에 그런 사람들을 본다면 '가난은 죄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매력은 왠만큼 노력하면 누구나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위의 약자(소위, 가난한 자들 뿐 아니라)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보장 제도를 강화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 하는 이유는, 구조적인 문제나 사회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 모두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약자가 가난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비록 결과적으로 빈곤층에 속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네번 째 경우처럼, 출발선이 다른 데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은 어떨까.

자본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아무리 '적자 생존'의 진화론이라 해도 인간의 세계는 약자는 모두 도태되는 동물의 세계가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약자에게 친절한 시스템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가난은 죄가 아닐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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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던 나는 나폴레옹과 한니발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느 교실의 뒤쪽에나 있을 법한 책장에는 문고판 나폴레옹 전기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있었는데, 나는 그 두 권을 읽고 또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두 인물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두 명 모두 알프스를 넘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일까? 하지만, 알프스를 넘은 또 한 명의 위인인 카이사르는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 역시 그러하다. 그가 정치적으로는 천재였지만 군사적으로는 그리 유능한 장수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나중에 자라서 읽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에 그런 사실을 알았을 리는 없고, 사실은 먼저 좋아하게 된 한니발의 적국인 로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적인 내 호불호(好不好)적 현실 감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서 항상 결정적인 순간 한니발을 괴롭히는 로마와, 나폴레옹을 방해하는 영국, 프러시아와 러시아에 분개했다. 저 나라들만 없었으면 저 두 인물이 꿈을 이루었을텐데. 초등학생 시절의 나만의 세계관에선 프랑스, 카르타고 같은 나라들이 우호국이었고 로마(이탈리아), 영국, 프러시아(독일), 러시아같은 나라들은 적국이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수업 시간에라도 그 나라들이 나올라치면, 항상 그 두 인물과 연관시켜 생각하곤 했고, 프랑스나 카르타고는 무조건 좋은 나라인 줄 알았다.

더이상 초등학생은 아닌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 두 인물을 상당히 좋아하는 이유는 서로가 자신들의 생사에 더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전쟁에서 나타내는 압도적인 자신감과 천재성,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항상 200% 이상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외적인 조건들에 막혀 결국은 꿈을 이루지 못하는 두 고독한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 같은 맹목적인 선호는 아니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두 인물을 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 정도는 느끼게 되었고, 그들의 상대방 역시 그들의 존망을 걸고 사력을 다해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프랑스나 카르타고라고 해서 선하기만 한 나라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탈리아, 영국, 독일, 러시아같은 나라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기만 한 나라는 아니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

따라서 나는 두 인물을 좋아하지만, 음악은 '프렌치 팝'이나 '샹송'이 아니라 영국의 'Brit Pop'이나 'Radiohead'의 노래를 좋아하고, 로마의 흥망성쇠를 다룬 '로마인 이야기'를 읽곤 한다. 러시아에서 어떻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며, 요즈음 독일 월드컵을 보면서 독일의 예상 밖 놀라운 실력에 혀를 내두른다.

며칠 전 있었던 대한민국:스위스전을 보고 난 후의 일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그분들의 세계관과 현실 감각에 조금 안타까움을 느낀다.
"스위스는 이제부터 가상 적국이다."
"너네는 중립국이 아니라 왕따였구나. 그러니까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시계나 뚝딱 만들고 있지."
"정의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크라이나의 완승입니다!... 원흉인 스위스, 이제 응징을 받는건가요?"

스위스 축구팀이 블래터 회장에게 판정을 유리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는지, 심판에게 돈을 건넸는지는 검증된 바 없다. 블래터 회장이 판정을 유리하게 하도록 지시했는지, 아니면 회장에 대한 심판들의 과잉 충성이었는지 역시(심증은 많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니, 설령 그러했다 하더라도 스위스 축구팀과 블래터 회장이 악하면 스위스 전 국민이 악인인가?
우크라이나가 완승을 해서, 이제 더이상 정의가 왜곡되는 일은 없어질 것인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왜 정치, 경제, 축구 어느 분야에서나 욕을 해댈 마녀가 필요한 건가?

축구 경기는 축구 경기일 뿐이다. 스위스에게 져서 그것도 판정 논란으로 져서 화가 나지만, 한국전에서의 스위스팀은 그들에게 굴러온 예상치 못한 떡을 꿀꺽했을 뿐이다. 크로아티아의 한 선수가 한 경기에 두 번 경고를 받고서도 시치미 떼고 뛰다가 세번 째에서야 퇴장한 것처럼. 축구에서의 스위스팀과 시계를 잘 만드는 중립국으로서의 스위스는 같은 미움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일본 축구가 매번 한국 축구에 깨진다고 해서 일본 정치가들이 "잘못했습니다. 독도 망언 이제 안할께요."라고 결코 말할리 없는 것처럼. 스위스팀이 미워 우크라이나 팀을 응원할 수 있지만, 스위스가 가상 적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니발을 좋아한다고 해서 로마를 나의 적국으로 여기는 초등학생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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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 외출을 하면서 비가 한차례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았기 때문에 우산을 들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주룩주룩 오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를 본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느긋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바로 앞에서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뛰어가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하는 것도 아닌 걸 보고선 같은 방향이니 함께 쓰고 가자고 할까 하다가 그냥 비가 오는 풍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세상이 하도 험악하다 보니 괜히 작업이니, 혹은 불순한 의도니 하는 의심이 서린 눈초리를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사 오기 전 우리 집은 초등학교 때 우리 선생님 댁과 가까웠다. 그래서 졸업하고도 몇 번 뵐 수가 있었는데, 그 선생님께 어린 따님이 있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산을 가지고 있었고, 우산을 쓰고 길을 가던 중, 그 선생님의 딸을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나는 그 아이를 쫓아가서
"우산 같이 쓰고 갈래?"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혹시나 해서 내가
"너희 집 이쪽 맞지?"
라고 물었더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었다. 귀여운 녀석^^ 걸어가면서 좀 친해지려고,
"이름이 뭐니?"
하고 물었더니, 그 꼬마 왈
"엄마가 그런거 모르는 사람한테 가르쳐 주지 말랬는데요?"
역시 선생님 딸다웠다. 참 똑똑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은 씁쓸했다.

앞서 걷는 그 여자를 보면서 갑자기 그 수년 전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워낙 비 맞는 걸 싫어해서 왠만하면 가벼운 3단 우산 하나쯤은 들고 다니는 나는 갑자기 오는 비에 당황하는 남자를 보면 노소를 막론하고 같이 쓰고 가는 편이다. 하지만, 여자라면 아주머니나 할머니라면 함께 쓰고 가자고 권하지만, 꼬마 아이나 젊은 처자면 모른 체 한다. 어쩌면 개인적인 성차별, 나이차별인지도 모르겠다. 또다른 의미의 소심함일 수도 있고...

나는 여전히 적어도 세상의 절반 이상의 남성들은 성폭력이나 원조 교제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와도, 단호히 거절할 만큼의 선량함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폭력이나 아동 성폭력의 상당수가 지인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주위의 남자들을 믿어달라는 변명이나 호소 역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성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히 여성과 그 가족일 것이고, 2차적인 피해자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 지 몰라 공포심을 갖는 모든 여성들이겠지만, 단지 대부분의 가해자들과 같은 성(性)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절반 이상의 선량한 남자들 역시 간접적인 피해자가 아닐까 싶다.

비가 더더욱 세차게 내리자 앞서 걷던 여학생은 이제서야 뛰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중년이 되면, 우산을 함께 쓰고 가자고 권하는 여성들의 연령 커트라인은 한참 더 위로 올라갈 것이다.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진다는 데, 왜 사람에 대한 공포심은 더해만 가느냐고 세상만 탓하면서, 그런 핑계를 대면서 어쩔 수 없다는 양, 남들을 도울 기회를 하나씩 하나씩 외면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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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블이나 다른 블로그에서 '나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라고 공공연히 밝히는 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투표를 할 때 특정 후보를 찍어야만 하는가?



저 글이 사실이라면 실수로 기권표가 나왔는지, 현 정치에 대한 불만이나 출마한 모든 후보에 대한 불신임의 의도에서 기권표가 나왔는지 궁금해진다.

이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이러한 연상을 하게 된 재미있는 블로그를 우연히 읽었다.



지난 2002년 유시민의 '사표론'을 들면서 "낙선한 후보에게 간 표는 사표겠지만, 그 사표는 그냥 죽어버린 표가 아니라, 나름의 의미를 가진 유권자들의 목소리다."라는 문장에 참 공감이 간다.

하나의 정답이 있는 시험문제가 아닌 이상, 나는 어느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사 역시 투표를 통해 밝힐 수 있지 않을까? 귀찮거나 정치에 무관심해서 무응답의 의미로 투표 참여를 안했는지, 특정한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기권표를 던졌는지 정확한 의사표현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조금 귀찮더라도 말이다. 그래야 기권표가 단순한 사표가 아닌 의미있는 표가 될 테니까. 아예 '모두 지지안함'이라는 선택란이 있어서, 그 쪽이 1위를 하면 모든 당이 후보를 다시 공천하게 해버렸으면 좋겠다. 한 80%정도가 거기에 찍으면, 정치가들이 정신 차릴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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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블에서 우연히 보고 별만 매겨놨다가 며칠 전 차분히 테스트해 보았다.

내 정치 성향 수치


내 정치 성향 좌표

컥;; 테스트 전부터 3사분면일 거란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왼쪽인 줄은 몰랐다. 아마, 질문의 수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가치관의 중요한 부분인 정치 성향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기는 힘들고, 추상적인 질문으로가 아닌 생활 속의 피부로 느끼는 부면에서는 좀더 보수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내 성향은 실제로는 다소 우로, 약간 위쪽이 아닐까 하는...

테스트 질문과 해석 및 해설은 여기로(혹여나 제 글을 보고 테스트하시는 분들... 이 포스트의 주인장 분 말씀대로 그냥 재미로 하시길^^)

이 님의 포스트에 달린 댓글이나 올블의 트랙백들을 봐도 자신은 자유주의적 좌파로 나온다는 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듯... 왜 그럴까? 댓글에도 여러 이유가 나오지만,
  1. 이런 테스트를 자발적으로 하고 댓글 달 만한 분들이 연령대가 낮거나 진보적일 가능성이 있다.
  2. '우익=보수=수구꼴통'이라는 그릇된 선입견때문에 오른쪽으로 나온 분들은 함구할 지도 모른다는 것. >_<(더구나 댓글의 대부분이 자유주의적 좌파시니...;;)
  3. 특정한 사건을 실생활에서 직접 맞닥뜨릴 때의 반응과는 달리,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답을 골랐을 지도...(나같은 경우가 아닐까...;; 하지만, 첨부된 여러 표본 인물들의 성향 결과들은 분명히 전문가들이 말과 행동을 평가한 것이었다. 머리 속에 담겨있는 생각이 아니라...)
요새 괜히 쓸데없는 보수-진보 개념 정리에 꽂혀있었는데, 이 나라에 살다보니 정신과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근데, 나만 헛갈리는 게 아닌가봐. 정치인들도 '좌파 신자유주의', '우파 사회주의'라는 말을 막 써대는 거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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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하는 괴담블로그님의 달콤, 살벌한 연인(2006)라는 포스트에 달린 댓글을 보다가 정말 배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아... 눈물 나와... 이런걸 보고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있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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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바침

L. Log/잡담 2006. 4. 21. 08:52
하늘이 그리도 어두웠었기에 더 절실했던 낭만   
지금 와선 촌스럽다 해도 그땐 모든게 그랬지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시절 70년대를...
이 포스트의 제목은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의 제목에서 따왔다. 정글 스토리 OST에 수록된 신해철의 '70년대에 바침'...

고등학교 때 N.EX.T와 신해철에 심취해 있던 친구녀석 덕분에 이 앨범을 들을 수 있었다. 정글스토리 - 기억이 맞다면 윤도현이 그 영화에 나오던가 했다 - 라는 영화는 망했던 걸로 아는데, 신해철이 만든 이 OST는 참 좋았었다. 언제인가 웹진에서 본 평도 아주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사중에 있는 총소리가 나던 해에 태어난 나로서는 너무 어린 시절이었기에 그 총소리에 이어 시작된 80년대에는 그렇게 절실했던 낭만이 넘쳐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기 시작하는 건, 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고 군사정권이 물러나면서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뭔가 변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최루탄 가스에 코 밑에 치약을 바르던 것도 점점 빈도가 잦아들었고, TV나 라디오에 나오는 음악이나 옷차림은 이전과 달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내가 중,고등학생이 된 90년대 중,후반에는 지금과는 다른 뭐랄까... 낭만이란게 있었다.

삐삐란 것도 정말 귀할 뿐만 아니라 학교에 가져오면 압수당하던 시절, 약속이 있으면 미리 전화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제시간에 도착하는게 예의였고, 서태지의 새 앨범이 나오면 누구보다도 더 빨리 사서 듣기 위해 발매일에 레코드 가게에 달려가 사서는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워크맨을 반복해서 돌리곤 했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잽싸게 녹음버튼을 눌러 나만의 편집앨범을 만들고, 좋아하는 아이가 있으면 어렵사리 수줍게 고백했고, 편지로 속마음을 나누곤 했다.

참 지금에 비하면 번거롭고 유치한 시절이었는데, 그 때가 참 멋스러워 보이고 그리울까... 요새 아이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참 불쌍해 보이고 그 낭만의 시대를 끝자락이나마 누려본 게 행운이라 느껴진다.

요즈음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네크로필리아라는 단어때문일까... 나만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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