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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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6.12 우산에서 시작된 쓸데없는 시대유감 1
어제 오후에 외출을 하면서 비가 한차례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았기 때문에 우산을 들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주룩주룩 오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를 본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느긋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바로 앞에서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뛰어가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하는 것도 아닌 걸 보고선 같은 방향이니 함께 쓰고 가자고 할까 하다가 그냥 비가 오는 풍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세상이 하도 험악하다 보니 괜히 작업이니, 혹은 불순한 의도니 하는 의심이 서린 눈초리를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사 오기 전 우리 집은 초등학교 때 우리 선생님 댁과 가까웠다. 그래서 졸업하고도 몇 번 뵐 수가 있었는데, 그 선생님께 어린 따님이 있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산을 가지고 있었고, 우산을 쓰고 길을 가던 중, 그 선생님의 딸을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나는 그 아이를 쫓아가서
"우산 같이 쓰고 갈래?"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혹시나 해서 내가
"너희 집 이쪽 맞지?"
라고 물었더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었다. 귀여운 녀석^^ 걸어가면서 좀 친해지려고,
"이름이 뭐니?"
하고 물었더니, 그 꼬마 왈
"엄마가 그런거 모르는 사람한테 가르쳐 주지 말랬는데요?"
역시 선생님 딸다웠다. 참 똑똑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은 씁쓸했다.

앞서 걷는 그 여자를 보면서 갑자기 그 수년 전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워낙 비 맞는 걸 싫어해서 왠만하면 가벼운 3단 우산 하나쯤은 들고 다니는 나는 갑자기 오는 비에 당황하는 남자를 보면 노소를 막론하고 같이 쓰고 가는 편이다. 하지만, 여자라면 아주머니나 할머니라면 함께 쓰고 가자고 권하지만, 꼬마 아이나 젊은 처자면 모른 체 한다. 어쩌면 개인적인 성차별, 나이차별인지도 모르겠다. 또다른 의미의 소심함일 수도 있고...

나는 여전히 적어도 세상의 절반 이상의 남성들은 성폭력이나 원조 교제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와도, 단호히 거절할 만큼의 선량함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폭력이나 아동 성폭력의 상당수가 지인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주위의 남자들을 믿어달라는 변명이나 호소 역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성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히 여성과 그 가족일 것이고, 2차적인 피해자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 지 몰라 공포심을 갖는 모든 여성들이겠지만, 단지 대부분의 가해자들과 같은 성(性)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절반 이상의 선량한 남자들 역시 간접적인 피해자가 아닐까 싶다.

비가 더더욱 세차게 내리자 앞서 걷던 여학생은 이제서야 뛰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중년이 되면, 우산을 함께 쓰고 가자고 권하는 여성들의 연령 커트라인은 한참 더 위로 올라갈 것이다.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진다는 데, 왜 사람에 대한 공포심은 더해만 가느냐고 세상만 탓하면서, 그런 핑계를 대면서 어쩔 수 없다는 양, 남들을 도울 기회를 하나씩 하나씩 외면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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