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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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22 윤동주 연보

출처: 개정판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 세계사)

1917년(1세)
12월 30일에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2), 모친 김용(金龍, 1891~1948)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본관 파평. 아명은 해환(海煥).당시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은 부유한 농부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보다 석 달 전인 9월 28일에는 고종사촌인 송몽규(宋夢奎, 1917~1945)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태어났다(아명은 韓範, 부친 宋昌義, 모친 尹信永). 윤동주와 송몽규는 둘 다 기독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윤동주의 호적을 비롯한 각종 공식 기록에 그의 출생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1923년(7세)
9월, 부친 윤영석은 관동 대지진 당시 동경에 유학중이었다.

1924년(8세)
12월, 누이 혜원(惠媛, 아명 貴女) 태어나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 및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이 있었다.

1927년(11세)
12월, 동생 일주(一柱, 아명 달환) 태어나다.

1928년(12세)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을 정기구독 시작. 송몽규는 『어린이』를 정기구독. 그들이 다 읽은 후 동리아이들이 빌려서 읽음. 명동에 공산주의 만연.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다.

1929년(13세)
4월,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형태에서 <인민학교>로 넘어갔다가 9월에는 중국 행정당국에 의해 공립으로 강제수용되다. 외삼촌 김약연 평양 장로교 신학교 입학.

1930년(14세)
김약연 1년 수학 후 목사가 되어 명동 교회 부임. 명동에 공산테러 성행.

1931년(15세)
3월 20일, 명동 소학교 졸업. 송몽규, 김정우 외 1명과 함께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대랍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이 해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

1932년(16세)
4월, 용정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하다.
부친 인쇄소 차렸으나 사업이 부진하다.

1933년(17세)
4월, 동생 광주(光柱) 태어나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인 시 3편을 제작 기일 명기하여 보관 시작
시 「초한대」(12. 24),「삶과 죽음」(12. 24)「내일은 없다」(12. 24)

1935년(19세)
1월 1일,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꽁트 부문에 「술가락」이 아명 <宋韓範>이란 이름으로 당선.
4월, 송몽규, 학업 중단하고 중국 낙양 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러 중국으로 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윤동주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 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으로 들어가다.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 간행의 학우지 『숭실활천』 제 15호에 시 「공상」 게재, 최초로 작품 활자화되다.
시 「거리에서」(1. 18), 「空想」(『 崇實活泉』 10월), 「蒼空」(10. 20), 「南쪽 하늘」(10)
동시 「조개껍질」(12)

1936년(20세)
3월,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퇴.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문익환은 5학년에 편입.
4월,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송몽규가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 압송되어 고초를 겪다.
9월 14일에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된 후 계속 요시찰인으로 감시당하다.
동시 「고향집」(1. 6), 「병아리」(1. 6)(『카톨릭 소년』 11월호 발표), 「오줌싸개지도」(『카톨릭 소년』 1937년 1월호 발표), 「기왓장내외」
시 「비둘기」(2. 10), 「離別」(3. 20), 「食券」(3. 20) 「牧丹峰에서」(3. 24), 「黃昏」(3. 25), 「가슴 1」(3. 25), 「종달새」(3), 「山上」(5), 「午後의 球場」(5), 「이런 날」(6. 10), 「양지쪽」(6. 26), 「山林」(6. 26), 「닭」(봄), 「가슴 2」(7. 24), 「꿈은 깨어지고」(7. 27), 「谷間」(여름), 「빨래」.
동시 「빗자루」「햇비」「비행기」
시 「가을밤」(10. 23)
동시 「굴뚝」(가을), 「무얼 먹고 사나」(10)(『카톨릭소년』 1937년 3월호 발표), 「봄」(10), 「참새」(12), 「개」, 「편지」, 「버선본」(12월초), 「눈」(12),「사과」, 「눈」, 「닭」
시 「아침」
동시 「겨울」(겨울), 「호주머니」(1936년 12월호, 또는 1937년 1월호 발표)
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1월호), 「빗자루」(12월호)를 발표할 때 <尹童柱>란 필명 사용.

1937년(21세)
4월, 졸업반인 5학년으로 진급.
송몽규는 대성중학교(4년제) 4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업 재개.
8월, 백석 시집 『사슴』을 배껴 필사본을 만들어 가지다. 이 무렵 광명중학교 농구선수로 활약.
9월,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 등지로 수학여행.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과 심하게 대립, 결국 조부의 개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연전 문과>에 진학하기로 결정되다.
시 「黃昏이 바다가 되어」(1)
동시 「거짓부리」(『카톨릭 소년』 10월호 발표), 「둘 다」, 「반딧불」
시 「밤」(3)
동시 「할아버지」(3. 10), 「만돌이」, 「나무」
시  「장」(봄), 「달밤」(4. 15), 「風景」(5. 29), 「寒暖計」(7.1), 「그女子」(7. 26), 「소낙비」(8. 9), 「悲哀」(8. 18), 「瞑想」(8. 20), 「바다」(9), 「山峽의午後」(9), 「毘盧峰」(9), 「窓」(10), 「遺言」(10. 24)(『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 23일자 발표)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4월 9일, 서울 연전 문과 입학. 대성중학교 4학년을 졸업한 송몽규도 함께 입학하다. 연전 기숙사 3층 지붕 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인이 한방을 쓰면서 연전생활 시작
시 「새로운 길」(5. 10)(학우회지『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비오는 밤」(6. 11), 「사랑의 殿堂」(6. 19), 「異蹟」(6. 19), 「아우의 印象畵」(9. 15)(『조선일보』 학생란 발표. 1939년 추정), 「코스모스」(9. 20), 「슬픈 族屬」(9), 「고추밭」(10. 26)
동시 「햇빛 · 바람」「해바라기 얼굴」「애기의 새벽」「귀뚜라미와 나와」「산울림」(5)(『소년』 1939년 발표).
산문 「달을 쏘다」(10)(『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호 발표)

1939년(23세)
연전 문과 2학년으로 진급.
기숙사를 나와서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 북아현동에서 살 때,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을 방문,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월), 시 「유언」(2. 16), 「아우의 인상화」(날짜 미상)를 윤동주(尹東柱) 및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 동시 「산울림」을 『少年』(날짜 미상)에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 『문장』『인문평론』을 매달 사서 읽다.
시 「달같이」(9), 「薇 병들어」(9), 「투르게네프의 언덕」(9), 「산골물」, 「自畵象」(9)(학우회지 『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少年」

1940년(24세)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다. 고향 후배인 장덕순 연전 문과 입학. 같이 입학한 하동 출신 정병욱(1922~1982)과 깊이 사귀다.
1939년 9월 이후 주욱 절필하다가 이해 12월에 가서 3편의 시를 쓰다.
시 「八福」(12월 추정), 「慰勞」(12. 3), 「病院」(12)

1941년(25세)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생활 시작.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집 옮기다.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전 4년을 졸업하다.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다.
시 「무서운 時間」(2. 7), 「눈오는 地圖」(3. 12), 「太初의 아침」「또 太初의 아침」(5. 31), 「새벽이 올 때까지」(5), 「十字架」(5. 31), 「눈 감고 가다」(5. 31), 「못 자는 잠」「돌아와 보는 밤」(6), 「看板없는 거리」「바람이 불어」(6. 2), 「또다른 故鄕」(9), 「길」(9. 30), 「별헤는 밤」(11. 5), 「序詩」(11. 20), 「肝」(11. 29)
산문 「終始」

1942년(26세)
연전 졸업 후 일본에 갈 때까지 한달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부친 일본 유학 권하다. 키에르케고르를 탐독. 졸업증명서, 도항증명서 등 도일수속을 위해 1월 19일에 연전에 <平沼東柱>라고 창씨한 이름을 계출하다. 1월 24일에 쓴 시 「懺悔錄」이 고국에서 마지막 작품이 되다.
3월에 일본에 건너가서 4월 2일에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송몽규는 <宋村夢奎>라고 창씨한 이름으로 도일하여 4월 1일에 경도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입학.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했다가 동북제국대학 편입을 목표로 급히 도일. 그러나 동북제대로 가지 않고 10월 1일에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 무전 아파트에서 하숙생활.
시 「懺悔錄」(1. 24), 「흰 그림자」(4. 14), 「흐르는 거리」(5. 12), 「사랑스런 追憶」(5. 13), 「쉽게 씌어진 詩」(6. 3), 「봄」<연대미상작품>
산문 「별똥 떨어진 데」「花園에 꽃이 핀다」

1943년(27세)
1월, 경도에 와서 맞은 첫 겨울방학에서 귀성하지 않고 경도에 남다.
7월 10일, 송몽규 특고경찰에 의해 경도 하압경찰서에 독립운동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윤동주, 고희욱도 검거되다.
소식을 듣고 동경에서 면회간 당숙 윤영춘이 윤동주가 <고오로기>란 형사와 대좌하여 그가 쓴 우리말 작품과 글들을 일역(日譯)하고 있는 것을 목격. 외사촌 김정우도 면회.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검찰국에 송국되다.

1944년(28세)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2 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2년(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일, 출감예정일 1945년 11월 30일).
4월 13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1 형사부는 송몽규에서 <징역2년>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7일, 출감예정일: 1946년 4월 12일).
이들은 판결 확정 뒤에 복강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 시작.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1945(29세)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복강형무소 안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
2월 18일, 북간도의 고향집에 사망통지 전보 도착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가져오려고 도일, 복강 형무소에 도착하여 먼저 송몽규를 면회해서,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동주가 그래서 죽었다는 증언을 듣다.
3월 6일,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
3월 7일, 복강형무소에서 송몽규 눈을 뜬 채 운명. 부친 송창희와 육촌동생 송희규가 도일하여 유해를 가져다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
봄이 되자 송몽규 가에서 <靑年文士宋夢奎之墓>란 비석을 해서 세웠고, 잇달아 윤동주 가에서도 <詩人尹東柱之墓>란 비석을 세운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조국이 해방되다.

1947년
2월 13일, 해방 후에 처음으로 유작 「쉽게 씌어진 詩」가 당시 주간이던 시인 정지용의 소개문을 붙여 『경향신문』 지상에 발표되다.
2월 16일, 서울 <플라워 회관>에서 첫 추도회 거행되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여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
5월, 5 · 10 제헌국회의원 선거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거

1955년
2월, 서거 10주년 기념으로 유고를 더 보충한 증보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정음사에서 출간되다. 이 증보판 시집부터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제외되었다. 그들이 납북인사 내지 좌익인사라는 혐의를 받는 걸 꺼린 것이다. 냉전시대의 비극적 상황의 한 단면이었다.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조도전대학의 대촌익부(大村益夫) 교수에 의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와 비석의 존재가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되다.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4월 5일에 북간도의 유지들이 명동 장재촌에 있던 송몽규의 묘를 용정 윤동주 묘소 근처로 이장하다.

1995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송몽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애국장>은 <독립장>보다 한 등급 아래 훈장이다.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판을 거듭하면서 계속 증보되었다.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다. 현재 윤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의 출간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들은 3백 편을 상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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