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 혜영(전지현)이 화가로 등장해서인지 전체적으로 영화가 한 폭의 수채화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기도 하고요. 전지현이 나온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개봉하기도 전부터 악평을 많이 받은 듯 하지만, 과연 이 영화를 한국 관객들을 타겟으로 만들었을까요? 일본이나 중국의 한류 열풍에 편승해볼까 하고 만들어진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뭐, 외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우성과 이성재의 연기는 괜찮았고, 많은 이들이 보지도 않고 욕하던 전지현의 연기는 평가 보류입니다. 이 영화는 지극히 정석적이고 심심한 멜로 영화입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끌만한 감정 과잉의 멜로 영화가 아니라, 홍콩 감독이 만든 영화라 그런지 앞서 말한 것처럼 벽에 걸려 있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감상할 만한 영화입니다. 전 요새 한국을 거의 휩쓸고 있는 감정 과잉이라는 유행이 숨막혀서 이 영화가 오히려 신선하더군요. 이 영화에서의 여주인공이란 그저 Ingenue[각주:1]형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Ingenue에도 등급이 있지만요. 이 영화에서의 여주인공은 그저 웃을 때 싱긋 웃고, 슬픈 장면에서 눈물 흘리는 역할만 잘하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엽기적인 그녀', '시월애' 등에서 우는 연기 하나는 일품이었던 전지현이 이 영화에서 딱히 별로였다는 생각은 안듭니다. 대사 연기가 필요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혹여 영화를 볼 예정이신 분들을 위해서... 아무튼 영화는 괜찮게 보았습니다. 암스테르담이니까 네덜란드였던가요? 영상도 멋졌고 음악도 좋았습니다. 특히, 헤이의 '데이지'. 아, 전 왜 그렇게 담담하면서 슬픔을 읊조리는 곡들이 그리 좋을까요?
보면서 남녀간의 사랑이란 얼마나 사람을 쉽게 현혹시키는 감정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혜영이 외나무 다리를 건너다 개울에 빠지는 모습을 본 박의(정우성)은 개울에 떠내려가던 그녀의 가방을 건져내고 그녀를 위해 멋진 나무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가방을 놓아둡니다. 그의 얼굴을 모르는 혜영은 감사의 표시로 데이지 꽃이 가득한 수채화를 그려 다리에 놓아두지요. 그 후로 암스테르담에서 전시회를 준비하며 광장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돈을 받는 일을 하는 혜영에게 매일 데이지 꽃이 배달됩니다. "Flower!"라는 외침만을 남기고요. 그런 그의 앞에 정우(이성재)가 나타나자, 혜영은 그 친절을 베푼 이가 정우였다고 믿어버립니다.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대입시켜버리는 것이죠. "이 남자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꽃을 배달해주던 그 남자야."라며 마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말입니다(물론 이성재도 잘생겼으니까 가능하겠죠?).
이런 일은 영화에서나 가능하겠지만, 실생활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특히 인터넷으로 익명의 사람들과 제한적인 소통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 요즘,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채 자신에게 건네는 다정한 채팅이나 글 한마디에 현혹당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요. 온라인 게임은 물론 블로그로도 그럴 수 있겠군요.
역시 사랑이란 감정도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와 같은 비논리와 선택의 문제일까요? '이 물건은 이점이 나에게 필요해서 꼭 사야해'라는 게 아니라, 사고 나서 이 물건이 내 맘에 드는 논리적인 이유를 찾는다는 것처럼요. 요새 주위에 누군가가 곁을 스치기라도 하면 기꺼이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사람처럼 구는 이들이 많아서 무난한 멜로 영화를 보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쉬운 점은 헤이의 '데이지' 뮤직비디오 하나만 봐도 영화를 본 거나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그만치 디테일은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아기자기한 드라마를 기대했다가는 실망 많이 했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