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다시 보면서 마음을 정말 단단히 먹어야 했다. 그 길지 않은 몇 년 동안 나도 모르게 자극적이고 현란한 영상과 전개에 길들여졌나보다.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보면서도 생각을 붙잡아 두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철없던 시절에 비해 생각이 너무 많아진 건지도 모른다.
홍콩, 신문 편집장인 차우(양조위) 부부와 비서일을 하고 있는 리첸(장만옥) 부부는 같은 날 이웃으로 이사오게 된다. 둘의 배우자는 출장이나 다른 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매우 잦다. 집앞 계단을 오르내리며, 집앞의 좁디좁은 복도를 오르내리면서 짧은 고갯짓으로 인사하던 그들. 어느날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의 넥타이, 핸드백이 상대방에게도 있음을 발견하고, 동병상련일까?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어간다. 차우는 무협 소설을 쓰고 있다면서 리첸에게 자신의 소설을 봐달라고 한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면서 집주인과 이웃들의 눈치를 피해 방을 하나 구해 무협 소설을 쓰는 차우와, 곁에 앉아 그것을 읽는 리첸.
둘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소설을 매개로 만나며, 식사를 하며 리첸은 차우를 남편인 양 남편의 애인에 대해 질문하는 예행연습을 하기도 하고, 차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울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날,
리첸: I didn't think you'd fall in love with me.
차우: I didn't either.
I was only curious to know how it started.
Now I know... Feeling can creep up just like that.
...
Will you do me one favor?
I want to be pepared...
날 사랑했다는 말인가요?
나도 모르게...
처음엔 그런 감정이 아니었소.
조금씩 조금씩, 당신을 느끼고 있었소.
...
부탁이 있어요.
미리 이별 연습을 해두죠...
둘의 관계에 대해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차우는 리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벽을 사이에 두고 벽에 머리를 마주 기대며, 일본에 있는 리첸의 남편이 리첸을 위해 라디오에 신청한 화양연화를 듣는 두 사람. 벽만 없었더라면 서로의 머리를 기대고 서로를 의지할 수 있을 것을... 딱 벽 만큼의 거리가 둘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거리다. 차우는 그녀가 함께 떠나주기를, 리첸 역시 표가 한 장 더 있는지 묻고 싶지만, 그저 허공에 말하듯 중얼거릴 뿐이다.
차우: In the old days,
If someone had a secret they didn't want to share...
You know what they did?
친구: Have no idea.
차우: They went up a mountain, found a tree...
Carved a hole in it...
And whispered the secret in to the hole.
Then they covered it with mud.
And leave the secret there forever.
옛날엔...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알게 뭐야.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곤...
진흙으로 봉했대...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그렇게 차우와 리첸은 헤어진다.
1966년 어수선한 홍콩[각주:1], 리첸은 예전 그들이 살았던 집을 찾아간다. 집주인은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가려고 하고 리첸은 차우와의 추억이 떠오르는 듯 창가에 서서 눈물을 보이다가는, 집주인에게 집세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그 집을 찾은 차우는 자신의 셋방에 살고 있는 낯선 남자로부터 이전 집주인은 이사갔으며, 옆집에는 아이가 있는 한 여인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차우는 옆집 문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인연은 영원히 어긋난다.
1966년 프랑스의 드골이 캄보디아를 방문하던 때, 리첸은 앙코르와트 사원을 찾는다. 사원의 구멍에 무엇인가를 속삭이는 리첸, 차마 다른이에게는 말하지 못할 무슨 비밀을 속삭였을까? 앙코르와트 사원을 떠나는 리첸, 그가 속삭이던 구멍은 풀로 막혀있다.
He remebers those vanished years.
As though looking through a dusty window pane,
the past is something he could see, but not touch.
And everything he sees is blurred and ingdistict.
그는 지나간 날들을 회상한다.
뿌옇게 먼지 낀 창을 통해 본 것처럼,
과거를 볼 수는 있겠지만, 만질 수는 없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불투명하게만 보였다.
예전에는 단지 둘의 사랑 이야기로만 보였던 영화, 왕가위 감독이 2000년 그 영화를 만들 때 그는 97년의 홍콩의 중국 반환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외롭고 쓸쓸하던 리첸의 일상에 가장 화려한 시절을 가져다준 건 차우이지만, 그녀는 곁에 있지도 않은 바람난 남편이 신청해준 '화양연화'라는 곡을 들어야 하는, 결국 남편을 떠날 수 없는 결혼에 매인 처지다. 화양연화의 시절을 누리던 홍콩이지만,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다. 감독의 이런 의도가 들어있지 않았다면, 영화 말미에 홍콩인의 불안함을 넌지시 암시할 이유도, 드골의 캄보디아 방문 영상을 넣을 이유도 없다. 화려한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한 미래... 선이 곱고 정적인, 다시 말해 우아한 영상이지만 과도하게 어두운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 서로의 사이에 놓인 벽에 머리를 기대며 화양연화를 듣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 장만옥이 아름답다거나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예외다. 그것도 이 영화의 단 한 컷. 윗 장면과 더불어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