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앞글 일리아스를 읽고 있습니다를 쓰면서 제가 착각했던 부분이 있네요. 그 당시의 그리스가 흔히 말하는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 시대처럼 도시국가들일 거라고 지레짐작 해버렸으니 ^^;

고대 그리스 / 위키 백과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 에게-미노아 문명
소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
B.C. 3000 청동기 돌입
B.C. 2000 선형 A 문자 사용, 미노아 문명의 전성기

2. 에게-미케네 문명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의 선조들이 주도한 문명
B.C. 2000년경부터 남하하여 그리스 본토에 자리잡고 원주민과 혼합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의 반도에 많은 소왕국을 건설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왕국 중 '황금의 미케네'로 일컬어질 정도로 맹주격(이 미케네 및 아르고스, 코린트의 왕이 아가멤논)
미케네는 미노아 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후 미케네가 에게 해의 패자가 된다.

3. 도리아 족의 남하
B.C. 12세기 그리스인의 마지막 이주자인 도리아족에 의하여 미케네 문명 몰락
미케네 사회 붕괴 후 그리스 본토에는 3개 내지 4개부족으로 구성된 소왕국 형성.
도리아족의 남하에 따른 혼란과 타국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 그 시기는 호메로스 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외도 많다.


여기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시기가, B.C. 기원전 1240~30년, 일설에는 기원전 1260경입니다. 2번의 에게-미케네 문명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지요(축적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략으로 분출하는 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예외가 없나 봅니다). 그리고 다음 세기에 도리아 족의 남하로 문명이 파괴됩니다.

일리아스는 대개 B.C. 8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방랑 시인들은 철기 시대에 청동기 시대의 사건들을 읊고, 사람들은 모여 앉아 그 무용담을 듣는 식이지요. 따라서 일리아스에서 아테네 여신이 아테네를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아테네가 트로이 전쟁 당시 어느 정도 세력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일리아스 2권의 그리스의 군세를 열거하는 내용 중에 아테네가 없길래, 다른 왕국들이 트로이 전쟁에 힘을 소진한 사이 서서히 패권을 잡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히려 도리아 족의 남하를 막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이네요. 하긴 트로이 전쟁의 B.C 1200년대와 B.C 5세기의 아테네의 전성기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데서부터 너무 말이 안되는 착각이긴 하지만요.

트로이 전쟁이 트로이의 부를 노린 침략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트로이 전쟁이 오히려 그리스 청동기 왕국들에게 독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앞글의 현이님의 댓글에 썼듯이 신화에 진실이 어느 정도 녹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1. 아트레우스가의 비극

... 트로이를 함락한 이후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프리아모스 왕의 딸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차지가 되었다. 귀향길에서 그가 아르골리스에 이르렀을 때,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과 그의 동료들, 카산드라를 살해했다.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이 전쟁에 나간 사이에 그의 아내를 유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그 살인을 클리템네스트라의 탓으로만 돌렸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아가멤논은 역사상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나 아르카이아의 대군주였던 듯하다. 헬레니즘 시대에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에게 제우스 아가멤논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숭배했다.


2. 오뒤세이아

... 거의 9년 동안 칼립소에 머물던 그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 이타카에 도착했으며 그가 방황하는 오랜 세월 동안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충실한 개와 유모 외에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가 옛날에 쓰던 활을 쏘아보라는 아내의 시험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성공하여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보였다. 그리고는 텔레마코스의 도움을 받아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죽이고, 페넬로페의 남편과 이타카 왕으로서의 지위를 되찾는다.

제가 기억하는 이 두 이야기 외에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신화에 트로이 전쟁의 후유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기스토스는 과연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사랑만을 원했던 것일까요? 특히 오뒤세이아의 아네 페넬로페에게 집적대는 구혼자들의 만행은 '오뒤세이아'를 읽어보면 더 적나라합니다만, 명색이 왕비인 오뒤세이아의 아내를 대하는 태도나 오뒤세이아의 재산을 멋대로 탕진하는 부분들을 읽어보면 한층 더 공감하실 듯 합니다. 과연 구혼자들이 페넬로페라는 미인만을 원했을까요? 아니면 오뒤세이아의 왕위와 부도 함께 원했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은 재미있네요. 자칫하면 지식의 짧음으로 잘못 추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착각했던 사실을 바로잡는 경우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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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12회에서 극중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不俱戴天之讐(불구대천지수)라는 말이 생각났다.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라는 뜻인데,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말이다.

MBC 드라마 주몽에 역사적 오류가 많다는 포스트는 몇 번 봤지만, 솔직히 학교에서 배운 것들 기억도 잘 안나고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에 대해 그리 깊이 배운 것 같지도 않아서 '아 그렇구나. 새겨봐야겠구나.'하고 말았었는데 오늘 보면서 또 한번 느꼈다.

해모수가 아들인 주몽에게 자신이 아버지임을 숨기고 어머니를 만나고 오라며 떠나보내는 장면, 금와왕의 장남인 대소 왕자가 해모수를 죽이는 장면, 뒤늦게 도착한 유화 부인과 금와왕이 죽은 해모수를 안고 오열하는 장면, 해모수에 대한 애착이 핏줄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고 그저 스승으로서의 해모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주몽의 모습 등의 드라마 장면은 솔직히 너무 감동적이고 마음이 아팠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정말 애절하게 잘 그려냈다.

하지만, 나중에 주몽이 부여와 대결하며 고구려를 건국해야 하는 정당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대소 왕자를 꼭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어야만 했을까. 완전 허구인 드라마도 그런 소재는 이제 식상할 지경인데, 역사적 인물까지 꼭 부모중 하나는 악당의 손에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제작진의 심보를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지만, 주몽이 해모수가 자신의 아버지였음을 알게 되면서 대소에 대해 한층 복수의 칼을 갈 것은 뻔하고, 선하고 우정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금와왕의 캐릭터와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건국해야만 하는 주몽의 캐릭터중 어느 것도 훼손시켜서는 안되는 드라마의 설정상, 대소가 갈수록 악당이 될 것 역시 뻔하다. 따라서 - 모두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본다면 다행이겠지만 - 나같이 학교에서 배운 수박 겉핥기식 국사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교육적이라고 부모들까지 시청을 장려할 어린이들은 이 드라마를 보고나서 '부여는 금와왕까지 잘 다스려지다가 대소의 사악함과 탐욕으로 한순간에 무너져야만 하는 정당성을 획득한 나라, 고구려는 이전의 부여를 계승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맥을 달리하는 나라'로 생각할 것이다. 마치 '의자왕과 3천 궁녀 이야기'로 인해 '백제는 어차피 멸망해야 할 나라였다, 신라가 당군까지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잘한 일이다'라는 이상한 논리에 한동안 속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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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나만의 지식 KIN이라도 개괄 정도는 정리해줘야 하나? ;; 링크로 패스;;


아마도 셈족(??? 다소 의문이 생기는...)인 페니키아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의 혼혈이었던 대부분의 카르타고 인들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 일부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가 과연 흑인 장군 - 정확히 말하면 검은 피부의 - 이었을지를 조사해보려 했으나, 자료 부족과 귀차니즘으로 다음으로 미룸 -0-;;

페니키아인들이 바알신을 숭배했으므로,

한니발(Hannibal)이라는 이름은 '바알의 축복을 받는 자'
바르카(Barca)는 '번갯불' 또는 '바알신이 내리는 번개'라는 의미.

로마를 침략한 것 때문에 전쟁광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상당히 냉정하고 균형잡힌 심성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하들에게 솔선수범하고, 잘 돌보았기 때문에 여러인종의 용병들임에도 로마군의 포위로 인한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투항 또는 탈영한 적이 없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승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보다 더 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경이로운 초승달-포위 전술때문에?

한니발이 결국 로마를 멸망시키지 못한 이유에 대한 많은 의견들이 존재한다.
  1. 한니발은 고대 최고의 전술가였을지는 몰라도, 전략가는 아니었다.
  2. 칸나에 전투 이후의 한니발의 행동이 너무 소극적이었다.
  3.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없었다(혹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므로, 부족했다).
  4. 한니발의 부하 중에 유능한 장수가 없었다.
  5. 그외 생각나거나 보는대로 첨가.
한니발이 별 수를 썼어도 이기지 못했을 게 뻔하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로마를 좋아해서는 절대 아님), 그래도 저 네 가지 중에 딱 하나를 꼽자면 4번을 꼽고 싶다. 1~3번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들은 한니발의 잘못이나 실수라기 보다는 로마가 매우 잘 대처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라는 참상을 일으키는 당사자를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개개인의 생사에 더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전쟁만큼 인간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한니발은 고금을 통틀어 유니크한 천재이지 싶다. 하지만, 그에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문과 천재적인 전술, 그 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로마인들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르듯, 그 전쟁은 일개인과 당시 가장 강력하게 부상하던 군사 국가와의 전쟁이었다.

전투에서는 항상 이기지만, 전쟁의 향방은 어쩌지 못하는 외로운 천재에 대한 동정심, 자신의 능력은 200% 이상 발휘하면서도, 항상 외적인 조건들에 막혀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한니발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요인들이 아닐까 싶다. 나부터도 '하다못해 두 동생들이라도 한니발의 반 정도만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니까.

우리는 그런 그에게 우리 자신들의 좌절감과 비애를 투영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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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L. Log/잡담 2006. 4. 1. 13:43
어제는 내일을 반사하는 거울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다.
원래 있던 글인지는 기억에 없다. 웬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어쨋거나 이 명제는 역사를 순환론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문장이다. 조금씩이나마 역사는 진보해 간다고 믿는 사람들은 결코 믿지 않을 명제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 문장을 믿는다. 이 문장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인간은 그리 창조적이지 않은 종족이라는 말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모방하는 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런지. 아아, 그에 더해 파괴하는 면에서도.

어릴 때부터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일 때는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서 선택하라면 역사를 공부해보고 싶었다. 역사를 공부하면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알 수 있지 않을까해서. 하지만, 내 짧은 생각이었다. 지금은 동일한 이유로 역사는 나에게 맞지 않는 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역시, 역사 하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모방의 종족이니까. 현재가 답답하면, 과거에서 답을 얻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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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tii Saeculi Crisis 위기로 치닫는 제국

독자들에게·15

'위기'의 질적 차이에 대하여 16

극복할 수 있었던 위기와 시종일관 대처에 쫓길 수밖에 없었던 위기의 차이...어렵더라도 로마인 본래의 사고나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시대와 눈앞의 위기에 대처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신들의 본질까지 바꾼 결과 더욱 심각한 위기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차이라고 해도 좋다.


제1부 로마 제국·3세기 전반

제1장(서기 211~218년)
카라칼라 황제(211~217년 재위)


누구나 로마 시민!

p.32

공정한 세제야말로 선정의 근간...선정이란 정직한 사람이 억울한 꼴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인간은 자기 주머니를 직접 공격하는 정책에는 과민 반응을 일으키게 마련이고, 이것이 폭동이나 반란으로 발전한 뒤에는 군사력으로 억누를 수밖에 없다.


p.36

권리라는 것은 일단 주었다가 다시 빼앗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기득권’과 ‘취득권’

p.38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하는 사회가 이질분자, 즉 외국인에 대해 폐쇄적인 경향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p.40

인간은 자기 본질에 바탕을 둔 행위를 했을 때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지는 법이다.


‘취득권’의 ‘기득권’화가 미친 영향

p.42

인간은 공짜로 얻은 권리는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 방위


로마의 인플레이션

p.51

계급간의 격차를 완전히 철폐하면 오히려 계급간의 유동성이 사라져버리는 법이다.


파르티아 전쟁


기동부대

p.62

정책이란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초래할지도 통찰한 뒤에 생각하고 실시해야 한다. 깊은 통찰과 정반대되는 극에 있는 것이 얕은 생각이다.


메소포타미아로

p.66

로마인은 예로부터 강화는 이긴 뒤에 맺는 것이고 지고 있는 동안은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다.


p.67

강대한 권력을 부여받은 이상 그에 따른 의무도 커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말했듯이, "지위가 높을수록 개인적인 자유는 제한된다" 이런 사고 방식이 일개 시민이라면 허용되는 일도 지위나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의 바탕이 되어 있었다.


p.69

로마인도 내란이 일어나면 로마인끼리 싸웠다. 아무도 외국을 내란에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내란이라는 이름의 세력다툼은 몇 번이나 일어나지만, 외국과 결탁하여 같은 로마의 라이벌을 밀어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로마인의 특질로 꼽아도 좋을 듯하다. 그런 짓을 저지르면 당장 동포의 지지를 잃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암살
마크리누스 황제(217~218년 재위)
철수
시리아의 여자
제위 탈환

제2장(서기 218~235년)
엘라가발루스 황제(218~222년 재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222~235년 재위)
법학자 울피아누스
6년간의 평화
충신 실각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
사산조 페르시아
부흥의 기치
페르시아 전쟁(1)
병사들의 파업
일차전
게르만 대책
라인 강변

제3장(서기 235~260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235~238년 재위)
실력과 정통성
원로원의 반격
1년에 황제 다섯 명
실무가 티메시테우스
동방 원정
고대의 지정학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244~249년 재위)
로마 건국 천년제
데키우스 황제(249~251년 재위)
기독교도 탄압(1)
야만족의 대침입
고트족
석관
야만족과의 강화
게르만족, 처음으로 지중해에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년 재위)
기독교도 탄압(2)

제2부 로마 제국·3세기 후반

제1장(서기 260~270년)
페르시아 왕 샤푸르
포로가 된 황제
페르시아에서 벌인 인프라 공사
갈리에누스 황제(253~268년 재위)
미증유의 국난
갈리아 제국
팔미라
삼분된 제국
하나의 법률
‘방위선’의 역사적 변화
군의 구조 개혁
스태그플레이션
‘장롱 저금’?
불신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268~270년 재위)
고트족의 내습

제2장(서기 270~28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270~275년 재위)
반격 개시
통화 발행권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다키아 포기
제노비아 여왕
일차전
이차전
팔미라 공방전
갈리아 회복
개선식
제국 재통합
비어 있는 황제 자리
타키투스 황제(275~276년 재위)
프로부스 황제(276~282년 재위)
야만족 동화 정책
카루스 황제(282~283년 재위)
페르시아 전쟁(2)
벼락

제3장 로마 제국과 기독교

연표·428
참고문헌·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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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나의 점수 : ★★★★★

역사는 과정에 있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면,
전쟁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입니다.
전쟁만큼 당사국 국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Bellum Hannibalicum 한니발 전쟁]

독자 여러분께

p.9

역사는 과정에 있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면, 전쟁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입니다. 전쟁만큼 당사국 국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에서는 뛰어난 그리스인인데,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데다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명장까지 갖고 있던 카르타고인인데, 왜 로마인에게 패했을까.

프롤로그

제1장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

p.24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0년 뒤에 과거의 적을 자기네 지도자로 선출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로마인의 이같은 성향은 포에니 전쟁을 치르는 로마에 커다란 이점을 가져다주게 된다.

p.35

항해술에 자신이 없는 로마인은 이 '까마귀'를 이용하여 해상 전투를 육상 전투로 바꾸려고 생각한 것이다...'까마귀' 같은 신무기를 생각해낸 것은 로마에 해운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p.43

과두정치는 선거를 거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의회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지도층을 구성하는 이들에게는 국정 제일선에서 활약할 기회를 가능한 한 평등하게 부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과두정치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단점 가운데 하나는 총사령관을 겸임하는 집정관이 임기중에 전과를 올리려고 애쓰기가 쉽다는 점이다...이것은 로마 집정관을 속전속결형으로 만들기 쉬워서, 포에니 전쟁 같은 장기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결함이 되었다.

p.44

지중해 세계에서 최강의 해군국으로 꼽히던 카르타고도 경쟁상대인 그리스가 쇠퇴한 뒤로는 적다운 적을 만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실전 경험을 쌓지 못한 군대는 약체화를 피할 수 없다. 기원전 3세기의 카르타고는 해운국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 해군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p.47

적에게 포로로 붙잡혔던 사람이나 사고 책임자에게 다시 지휘를 맡기는 것은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려는 온정이 아니다. 한 번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그 실수에서 틀림없이 교훈을 얻었으리라는 게 그 이유니까 재미있다.

p.56

하밀카르는 움직임이 봉쇄당하는 것을 꺼렸다. 주도권은 자신이 잡지 않으면 안된다.

p.61

마키아벨리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점이지만, 공화정 로마에서는 군사령관을 겸임하는 집정관에게 일단 임무를 주어 내보낸 뒤에는 원로원조차도 작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패전 책임을 묻지 않는 것도 걱정없이 임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p.63

로마는 상대가 받아들이기 쉬운 쪽으로 강화를 맺었다.


제2장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기원전 241년~기원전 219년

p.67

전쟁이 끝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는 결정된다. 승패는 이미 판가름났으니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거기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p.68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긴 쪽보다 진 쪽이 더 많은 압박에 시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p.75

로마인의 남다른 점은 뭐든지 자기들이 다 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자기네가 제일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p.90

투표권으로 나타나는 권리의 확산은 병역으로 나타나는 의무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로마 군단을 구성하는 시민병도 더욱 광범위한 시민권 보유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군단 지휘관에게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더불어, 로마라는 국가의 거국일치 체제를 강화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p.92

로마인은 체계화를 좋아했지만, 융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p.97

무장으로서 최고사령관의 능력은 백인대장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 명장들은 모두 백인대장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들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제3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전기 기원전 219년~기원전 216년

p.119

한니발이 동시대인에 비해 단연 뛰어난 점은 정보의 중요성에 착안한 점이었다.

p.134

'로마 연합'을 정치 건축의 걸작이라고 평한 토인비의 주장...로마는 이 패배자들을 피지배민족이라는 소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소키'라는 적극적인 존재로 대우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도를 비롯한 로마의 '사회간접자본'설비에서도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승리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지만, 한니발과 대결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로마가 가진 진정한 힘이 되었다.

p.135

한니발이 치른 전투를 추적해 보면, 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술을 철저히 공부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보병과 기병의 비율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p.136

전투 결과를 좌우하는 전술은 콜럼버스의 달걀인 동시에 콜럼버스의 달걀이 아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콜럼버스의 달걀이지만, 그 방식을 답습해도 누구나 반드시 같은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콜럼버스의 달걀이 아니다. 그 방식을 살리느냐의 여부는 그 방식을 실제로 구사하는 인간의 재능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알렉산드로스니까 성공했지, 누가 해도 성공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의 선례를 참고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독자성으로 그 방식을 살렸다.

티치노-제1회전

트레비아-제2회전

p.145

이 시대의 평민 출신 집정관 중에는 강경한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명예심이나 출세욕에 사로잡혀 그러는 것은 아니다. 호민관이 평민의 대표자였던 시대보다, 평민 출신이 귀족을 포함한 로마 시민 전체의 대표인 집정관에 선출된 시대에는 자기가 평민계급의 대표자라는 것을 더 강렬하게 의식한다. 자기 출신계급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기 뒤를 이을 평민계급 출신 집정관을 위해서라도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p.148

포위전법은 적의 주력 부대를 무력화시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전술의 기본이기도 했다.


트라시메노-제3회전

p.154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각오는 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식까지 지배계급의 무능에 희생되는 것을 감수할 마음은 나지 않기 때문이다.

p.171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아무리 방해를 받아도 해내고야 마는 것을 "한니발은 무엇이든 통과한다"는 한 마디로 바꾸어 말하게 되었다.


칸나에-제4회전

p.173

서구의 사관학교라면 반드시 가르친다는 역사상 유명한 칸나에 전투

p.178

31세의 장군은 로마군 사령관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들은 적장의 책략에 빠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전쟁터로 끌어내려면 그 경계심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마치 로마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p.186

로마라는 나라가 수도에만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형태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로마라는 나라는 면과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

p.190

자신이 목적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선례는 없을까 하고, 선인들의 업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있는 법이다. 한니발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p.192

마케도니아의 젊은 장군(알렉산드로스)은 기병이 갖는 기동력을 구사하여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사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군 전체를 유기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적의 주력부대를 무력화시키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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