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출처: 개정판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 세계사) p.147-50

  ...시 「공상(空想)」은 윤동주가 쓴 시들 중에서 최초로 활자화된 것으로서, 그 점에서는 아주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공상」은 1935년 10월에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지에 게재되었다. 『숭실활천』은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하던 학우회지로서 1922년에 창간되었다.[각주:1]

공상(空想)

空想 ─
내 마음의 塔
나는 말없이 이 塔을 쌓고 있다.
名譽와 虛榮의 天空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無限한 나의 空想 ─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벌려서
나의 바다에서
自由로이 헤엄친다.
黃金 知慾의 水平線을 向하여.

  윤동주는 이때 시를 실었을 뿐 아니라 『숭실활천』의 편집도 했었다고 한다. 그 일에 대해 문익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동주는 숭실학교에 한 학기(필자 주: 두 학기의 착오)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동안 학교 문예지 편집을 맡았었고 거기 동주의 시 한 편이 실렸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갓 편입해온 학생에게 그 일이 돌아간 것은 <은진중학교>에서 먼저 숭실에 나가 있던 이영헌(李永獻, 현 장로회 신학대학 교수)이가 문예부장이 되면서 동주에게 그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때 동주는 내게도 시를 한 편 써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 편 써 내었더니 <이게 어디 시야> 하면서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시는 나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었다. 동주가 살아 있어서 내가 하는 성서번역을 도와주었다면(살아 있다면 기꺼이 도와 주었을 것이다) 나는 영영 시를 써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각주:2]

  이것은 윤동주 자신의 시의 변모와 관련해서도 아주 흥미있는 일화다. 그가 위의 시 「공상」을 학교 잡지에 싣던 무렵에, 문익환의 시를 보고는 <이게 어디 시야>라는 매우 야무진 무안을 주며 되돌려주었다는 것은, 당시 그 자신의 <시관(詩觀)>이랄까 하는 것을 뚜렷이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시관>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시>라고 자부한 그 자신의 「공상」이란 시에서 연역해낼 수 밖에 없다.
  「공상」이라는 시를 다시 곰곰이 뜯어 읽어보자. 그가 <화려하고 조숙한 느낌의 수사들을 사용해서 엮은 그물로 어떤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맵씨 있게 낚는 것>을 <시>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 인상을 부인할 수 없다. 「공상」뿐만 아니라 1936년 10월 이전의 시들은 대개 그런 분위기이다.

...

  이렇게 일관된 일련의 시적 경향들은 1935년 10월에 이르기까지 윤동주가 생각했던 <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마도 문익환의 시는 이런 기준과 구도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기에 그의 눈에 <시>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학소년 취향의 관념적이고 또 상당한 현학취미를 보이는 <어려운> 시들은 1935년 10월을 끝으로 그뒤로는 일제히 자취를 감춘다.
  1. 『숭실대학교 90년사』, p.257. [본문으로]
  2. 문익환, 「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 『월간중앙』, 1976. 4, p.3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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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정판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 세계사) p.146

  윤동주는 숭실에서 3학년 2학기와 3학기를 공부했다. 이것이 그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객지 생활을 한 경험이다. 북간도에서 평양까지의 교통은 아주 불편했다. 용정에서 기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상삼봉 · 회령 · 청진 · 원산을 거쳐 서울까지 간다. 서울에서 신의주행 기차를 타고 평안도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평양에 내리는 것이다. 숙식은 물론 학교 기숙사에서 했다. 기숙사 식당에선 밥을 주는데, 식권제도를 썼다. 그의 시 「식권(食券)」에 그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식권은 하루 세 끼를 준다.

식모는 젊은 아이들에게
한때 흰 그릇 셋을 준다.

大洞江 물로 끓인 국,
平安道 쌀로 지은 밥,
조선의 매운 고추장,

식권은 우리 배를 부르게
「식권(食券) 」전문(1936.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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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정판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 세계사) p.106-7

  그의 새로운 문학적 출발점이 된 세 편의 시 중에서 특히 「초한대 」는, 거기 나오는 시구 그대로 <깨끗한 제물(祭物)>이 된 그의 일생을 상징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하여, 연구가들의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다.

초한대

초 한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光明의 祭壇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
그의 生命인 心志까지
白玉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祭物의 偉大한 香내를 맛보노라.
(1934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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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정판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 세계사)

1917년(1세)
12월 30일에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2), 모친 김용(金龍, 1891~1948)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본관 파평. 아명은 해환(海煥).당시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은 부유한 농부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보다 석 달 전인 9월 28일에는 고종사촌인 송몽규(宋夢奎, 1917~1945)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태어났다(아명은 韓範, 부친 宋昌義, 모친 尹信永). 윤동주와 송몽규는 둘 다 기독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윤동주의 호적을 비롯한 각종 공식 기록에 그의 출생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1923년(7세)
9월, 부친 윤영석은 관동 대지진 당시 동경에 유학중이었다.

1924년(8세)
12월, 누이 혜원(惠媛, 아명 貴女) 태어나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 및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이 있었다.

1927년(11세)
12월, 동생 일주(一柱, 아명 달환) 태어나다.

1928년(12세)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을 정기구독 시작. 송몽규는 『어린이』를 정기구독. 그들이 다 읽은 후 동리아이들이 빌려서 읽음. 명동에 공산주의 만연.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다.

1929년(13세)
4월,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형태에서 <인민학교>로 넘어갔다가 9월에는 중국 행정당국에 의해 공립으로 강제수용되다. 외삼촌 김약연 평양 장로교 신학교 입학.

1930년(14세)
김약연 1년 수학 후 목사가 되어 명동 교회 부임. 명동에 공산테러 성행.

1931년(15세)
3월 20일, 명동 소학교 졸업. 송몽규, 김정우 외 1명과 함께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대랍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이 해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

1932년(16세)
4월, 용정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하다.
부친 인쇄소 차렸으나 사업이 부진하다.

1933년(17세)
4월, 동생 광주(光柱) 태어나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인 시 3편을 제작 기일 명기하여 보관 시작
시 「초한대」(12. 24),「삶과 죽음」(12. 24)「내일은 없다」(12. 24)

1935년(19세)
1월 1일,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꽁트 부문에 「술가락」이 아명 <宋韓範>이란 이름으로 당선.
4월, 송몽규, 학업 중단하고 중국 낙양 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러 중국으로 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윤동주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 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으로 들어가다.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 간행의 학우지 『숭실활천』 제 15호에 시 「공상」 게재, 최초로 작품 활자화되다.
시 「거리에서」(1. 18), 「空想」(『 崇實活泉』 10월), 「蒼空」(10. 20), 「南쪽 하늘」(10)
동시 「조개껍질」(12)

1936년(20세)
3월,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퇴.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문익환은 5학년에 편입.
4월,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송몽규가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 압송되어 고초를 겪다.
9월 14일에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된 후 계속 요시찰인으로 감시당하다.
동시 「고향집」(1. 6), 「병아리」(1. 6)(『카톨릭 소년』 11월호 발표), 「오줌싸개지도」(『카톨릭 소년』 1937년 1월호 발표), 「기왓장내외」
시 「비둘기」(2. 10), 「離別」(3. 20), 「食券」(3. 20) 「牧丹峰에서」(3. 24), 「黃昏」(3. 25), 「가슴 1」(3. 25), 「종달새」(3), 「山上」(5), 「午後의 球場」(5), 「이런 날」(6. 10), 「양지쪽」(6. 26), 「山林」(6. 26), 「닭」(봄), 「가슴 2」(7. 24), 「꿈은 깨어지고」(7. 27), 「谷間」(여름), 「빨래」.
동시 「빗자루」「햇비」「비행기」
시 「가을밤」(10. 23)
동시 「굴뚝」(가을), 「무얼 먹고 사나」(10)(『카톨릭소년』 1937년 3월호 발표), 「봄」(10), 「참새」(12), 「개」, 「편지」, 「버선본」(12월초), 「눈」(12),「사과」, 「눈」, 「닭」
시 「아침」
동시 「겨울」(겨울), 「호주머니」(1936년 12월호, 또는 1937년 1월호 발표)
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1월호), 「빗자루」(12월호)를 발표할 때 <尹童柱>란 필명 사용.

1937년(21세)
4월, 졸업반인 5학년으로 진급.
송몽규는 대성중학교(4년제) 4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업 재개.
8월, 백석 시집 『사슴』을 배껴 필사본을 만들어 가지다. 이 무렵 광명중학교 농구선수로 활약.
9월,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 등지로 수학여행.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과 심하게 대립, 결국 조부의 개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연전 문과>에 진학하기로 결정되다.
시 「黃昏이 바다가 되어」(1)
동시 「거짓부리」(『카톨릭 소년』 10월호 발표), 「둘 다」, 「반딧불」
시 「밤」(3)
동시 「할아버지」(3. 10), 「만돌이」, 「나무」
시  「장」(봄), 「달밤」(4. 15), 「風景」(5. 29), 「寒暖計」(7.1), 「그女子」(7. 26), 「소낙비」(8. 9), 「悲哀」(8. 18), 「瞑想」(8. 20), 「바다」(9), 「山峽의午後」(9), 「毘盧峰」(9), 「窓」(10), 「遺言」(10. 24)(『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 23일자 발표)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4월 9일, 서울 연전 문과 입학. 대성중학교 4학년을 졸업한 송몽규도 함께 입학하다. 연전 기숙사 3층 지붕 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인이 한방을 쓰면서 연전생활 시작
시 「새로운 길」(5. 10)(학우회지『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비오는 밤」(6. 11), 「사랑의 殿堂」(6. 19), 「異蹟」(6. 19), 「아우의 印象畵」(9. 15)(『조선일보』 학생란 발표. 1939년 추정), 「코스모스」(9. 20), 「슬픈 族屬」(9), 「고추밭」(10. 26)
동시 「햇빛 · 바람」「해바라기 얼굴」「애기의 새벽」「귀뚜라미와 나와」「산울림」(5)(『소년』 1939년 발표).
산문 「달을 쏘다」(10)(『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호 발표)

1939년(23세)
연전 문과 2학년으로 진급.
기숙사를 나와서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 북아현동에서 살 때,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을 방문,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월), 시 「유언」(2. 16), 「아우의 인상화」(날짜 미상)를 윤동주(尹東柱) 및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 동시 「산울림」을 『少年』(날짜 미상)에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 『문장』『인문평론』을 매달 사서 읽다.
시 「달같이」(9), 「薇 병들어」(9), 「투르게네프의 언덕」(9), 「산골물」, 「自畵象」(9)(학우회지 『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少年」

1940년(24세)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다. 고향 후배인 장덕순 연전 문과 입학. 같이 입학한 하동 출신 정병욱(1922~1982)과 깊이 사귀다.
1939년 9월 이후 주욱 절필하다가 이해 12월에 가서 3편의 시를 쓰다.
시 「八福」(12월 추정), 「慰勞」(12. 3), 「病院」(12)

1941년(25세)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생활 시작.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집 옮기다.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전 4년을 졸업하다.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다.
시 「무서운 時間」(2. 7), 「눈오는 地圖」(3. 12), 「太初의 아침」「또 太初의 아침」(5. 31), 「새벽이 올 때까지」(5), 「十字架」(5. 31), 「눈 감고 가다」(5. 31), 「못 자는 잠」「돌아와 보는 밤」(6), 「看板없는 거리」「바람이 불어」(6. 2), 「또다른 故鄕」(9), 「길」(9. 30), 「별헤는 밤」(11. 5), 「序詩」(11. 20), 「肝」(11. 29)
산문 「終始」

1942년(26세)
연전 졸업 후 일본에 갈 때까지 한달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부친 일본 유학 권하다. 키에르케고르를 탐독. 졸업증명서, 도항증명서 등 도일수속을 위해 1월 19일에 연전에 <平沼東柱>라고 창씨한 이름을 계출하다. 1월 24일에 쓴 시 「懺悔錄」이 고국에서 마지막 작품이 되다.
3월에 일본에 건너가서 4월 2일에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송몽규는 <宋村夢奎>라고 창씨한 이름으로 도일하여 4월 1일에 경도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입학.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했다가 동북제국대학 편입을 목표로 급히 도일. 그러나 동북제대로 가지 않고 10월 1일에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 무전 아파트에서 하숙생활.
시 「懺悔錄」(1. 24), 「흰 그림자」(4. 14), 「흐르는 거리」(5. 12), 「사랑스런 追憶」(5. 13), 「쉽게 씌어진 詩」(6. 3), 「봄」<연대미상작품>
산문 「별똥 떨어진 데」「花園에 꽃이 핀다」

1943년(27세)
1월, 경도에 와서 맞은 첫 겨울방학에서 귀성하지 않고 경도에 남다.
7월 10일, 송몽규 특고경찰에 의해 경도 하압경찰서에 독립운동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윤동주, 고희욱도 검거되다.
소식을 듣고 동경에서 면회간 당숙 윤영춘이 윤동주가 <고오로기>란 형사와 대좌하여 그가 쓴 우리말 작품과 글들을 일역(日譯)하고 있는 것을 목격. 외사촌 김정우도 면회.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검찰국에 송국되다.

1944년(28세)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2 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2년(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일, 출감예정일 1945년 11월 30일).
4월 13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1 형사부는 송몽규에서 <징역2년>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7일, 출감예정일: 1946년 4월 12일).
이들은 판결 확정 뒤에 복강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 시작.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1945(29세)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복강형무소 안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
2월 18일, 북간도의 고향집에 사망통지 전보 도착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가져오려고 도일, 복강 형무소에 도착하여 먼저 송몽규를 면회해서,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동주가 그래서 죽었다는 증언을 듣다.
3월 6일,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
3월 7일, 복강형무소에서 송몽규 눈을 뜬 채 운명. 부친 송창희와 육촌동생 송희규가 도일하여 유해를 가져다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
봄이 되자 송몽규 가에서 <靑年文士宋夢奎之墓>란 비석을 해서 세웠고, 잇달아 윤동주 가에서도 <詩人尹東柱之墓>란 비석을 세운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조국이 해방되다.

1947년
2월 13일, 해방 후에 처음으로 유작 「쉽게 씌어진 詩」가 당시 주간이던 시인 정지용의 소개문을 붙여 『경향신문』 지상에 발표되다.
2월 16일, 서울 <플라워 회관>에서 첫 추도회 거행되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여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
5월, 5 · 10 제헌국회의원 선거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거

1955년
2월, 서거 10주년 기념으로 유고를 더 보충한 증보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정음사에서 출간되다. 이 증보판 시집부터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제외되었다. 그들이 납북인사 내지 좌익인사라는 혐의를 받는 걸 꺼린 것이다. 냉전시대의 비극적 상황의 한 단면이었다.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조도전대학의 대촌익부(大村益夫) 교수에 의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와 비석의 존재가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되다.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4월 5일에 북간도의 유지들이 명동 장재촌에 있던 송몽규의 묘를 용정 윤동주 묘소 근처로 이장하다.

1995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송몽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애국장>은 <독립장>보다 한 등급 아래 훈장이다.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판을 거듭하면서 계속 증보되었다.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다. 현재 윤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의 출간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들은 3백 편을 상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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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윤동주 평전(개정판)
저자: 송우혜
출판: 세계사
출간: 1998년 08월 13일 출간





머리말

p.11
  <칸트나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은 그들의 생애, 즉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하는 것은 아예 문제삼지 않고, 다만 그들의 저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주관적인 사상가의 경우는 다른다. 그의 생애를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의 저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저서는 모두 저자의 생활체험의 표현이며 고백이고 또 자서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고 심취했던 철학자였기도 하거니와, 생애를 모른다면 그 저작 또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둘은 꼭같은 패턴의 사람들이었다.

1 시인의 출생

2 지사들의 마을 명동

3 해란강의 심장 용정(龍井)

4 송몽규 이야기

p.105
  그가 최초로 날짜를 명시해서 둔 작품은 <1934년 12월 24일>에 쓰여진 것으로 기록된 「삶과 죽음」「초한대」「내일은 없다」의 세 작품이다. 윤동주의 시집에 첨부된 연보에 의하면, 이 세 작품이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다>라고 지적되어 있다.

5 평양에서의 7개월

p.140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서시」를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서시」의 앞부분
  윤동주의 시를 분석할 때 가장 빈번하게 논의되는 것이 곧 <부끄럼의 미학>이라는 명제이다. 사실 그의 시에서도 특히 <부끄럼>이란 정서에 의탁해서 우리 삶의 고뇌를 슬퍼하고 반추하는 구절들은 참으로 뛰어나다. 윤동주가 마련한 이런 통로들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의 생이 지닌 한계를, 그리고 그 슬픔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독법의 하나를 구비하게 된 것이다... 윤동주 이전엔 이토록 자기의 전 존재를 던져서 사람의 삶이 업보처럼 지니게 마련인 근원적인 부끄럼과 마주선 존재가 없었다. 우리는 무수한 세대를 기다려서야 드디더 이 구절을 얻은 것이다.
  이 구절에 이르면 우리는 드디어 깨닫게 된다. <부끄럼>이란 것은 인간이 지닌 일상적인 정서의 하나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실존 그 자체에 관한 성찰의 한 양식이라는 것을. 그렇다! <부끄럼>이란 것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이 그들의 불완전함을 슬퍼하는 참회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이 정직하게 부끄럼에 마주서자면 그의 전 존재, 그의 전 중량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면으로 마주서본 경험이 없는 한 이토록 가슴을 치는 절창은 솟아날 수 없는 것이다.

p.143-4
  이것은 그가 자신의 실패와 그 수치 앞에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하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섰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얼버무려 스스로를 위로하며 슬쩍 넘어갈 수 있었으면 그는 그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러지를 않았다. 수치 앞에서 정직했고 성실했다. 그가 그럴 수 있다는 건 아마도 그가 청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것은 신의 축복이다. 정결한 마음이란 것은 아무에게나 허용된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타고나야 소유할 수 있는 천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50
  문학소년 취향의 관념적이고 또 상당한 현학 취미를 보이는 <어려운> 시들은 1935년 10월을 끝으로 그 뒤로는 일제히 자취를 감춘다.

p.151
...시에 있어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쉬운 말로 구체적이고 진솔하게 감정을 엮어가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의 특색과 내음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p.152
  그가 보인 변화, 특히 관념적인 말로 화려하게 엮던 문학청년 취향의 어려운 시를 버리고 느닷없이 동시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윤동주의 연구가들은 설명하기에 애를 먹는다. 그래서 이 현상을 두고 <그가 당시 유아적 퇴행현상을 보였다>고까지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열쇠가 따로 있다. 바로 『정지용 시집』이다.
  ... 정지용은 윤동주가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한 시인이다. 지금도 윤동주의 유품 중에 『정지용 시집』이 남아있는데, 도처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고, 곳에 따라서는 적절한 촌평도 가해져 있는 등, 그가 얼마나 정독하던 책인지를 알 수 있다.

6 다시 용정으로 돌아오다

7 젊음의 정거장, 서울 연희 전문학교

p.192
  처음엔 의과를 안 간다고 몹시 언짢아하셨긴 하지만, 아버지도 서울의 연전학생인 오빠가 귀향하자 몹시 자랑스러워하셨지요. 첫 여름방학에 오빠가 귀향해서 교회고 어디고 여러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다닐 때 사각모자를 안 쓰고 나가면 아버지는 냅다 소릴 지르시는 거예요. <모자 쓰고 가라!> 하고요. 하하! 그러면 오빠는 마지못해 쓰고 나가서는 길에서 벗어 담 안으로 던져버리고 가거나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놓고 가더군요. 하하......
동생 윤혜원
8 6첩방의 고장, 일본

9 체포, 재판, 복역, 옥사

10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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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
And this maiden she lived with no other thought
Than to love and be loved by me.

I was a child and she was a child,
In this kingdom by the sea,
But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
I and my Annabel Lee --
With a love that the winged seraphs in Heaven
Coveted her and me.

And this was the reason that, long ago,
In this kingdom by the sea,
A wind blew out of a cloud, chilling
My beautiful Annabel Lee;

So that her high-born kinsmen came
And bore her away from me,
To shut her up in a sepulchre
In this kingdom by the sea.

The angels, not half so happy in Heaven,
Went envying her and me: --
Yes! ― that was the reason (as all men know,
In this kingdom by the sea)
That the wind came out of the cloud, by night,
Chilling and killing my Annabel Lee.

But our love it was stronger by far than the love
Of those who were older than we --
Of many far wiser than we --
And neither the angels in Heaven above,
Nor the demons down under the sea,
Can ever dissever my soul from the soul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feel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 my darling --, 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애너벨 리

아주 아주 오래 전
바닷가 한 왕국에
한 소녀가 살았어요.
애너벨 리라면, 당신도 알지 몰라요.
이 소녀는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것밖엔
딴 생각은 아무 것도 없이 살았어요.

나도 어렸고 그 애도 어렸죠.
바닷가 이 왕국에서.
하지만 우린 보통 사랑 이상으로
사랑했어요. 나와 애너벨 리는.
하늘의 날개달린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시샘할 만한 사랑으로.

그 때문에 오래 전, 바닷가 이 왕국에서
한 차례 바람이 구름으로부터 불어와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리곤 그녀의 지체 높은 친척들이 와서
그녀를 내곁에서 데려가
바닷가 이 왕국
무덤에 가둬 버렸죠.

천국에서 우리 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한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시기한 것이었어요.
그래요! -- 그 때문이었죠 (바닷가 이 왕국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요)
밤에 구름속에서 한 차례 바람이 일어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죽여 버린 건.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더 강했답니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
우리보다 현명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요.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도
바다 밑의 악마들도
내 영혼과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을
떼어놓지 못해요.

달빛이 빛날 때마다 난 언제나 꿈을 꾸거든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별들이 뜰 때마다 나는 느껴요,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를.
그래서 나는 밤새도록
내 사랑, 내 사랑, 내 생명, 내 신부의
곁에 눕는답니다. 그 곳 바닷가 무덤,
파도 철썩이는 바닷가 무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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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한 방울에 소주 한 잔.
소주 한 잔에 쓰디쓴 추억 하나.
쓰디쓴 추억에 눈물 한 방울.
그래서 결국...
비 한 방울은 눈물 한 방울.

시야가 흐려오는 건
술기운 탓일까. 추억 탓일까.
뺨을 흐르는 건
비 한 방울일까. 눈물 한 방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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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해도 그대는 고개를 돌립니다.
벼르고 별렀던 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그대는 웬일인지 눈물만 글썽입니다.

다른 말은 하나도 못하겠습니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준비했던 숱한 말들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말만 부지런히 되뇌였는데
그대는 웬일인지 찻잔만 매만집니다.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내가 싸워야 할 상대는 그대가 아니라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임을.
내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그대의 현실,
그것과 나는 이제 한판 싸움을 벌일 것입니다.
누가 나가떨어지든간에 한판 거창하게
싸움을 벌여볼 것입니다.
- 이정하 시집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에서...

예전에 좋다고 생각했던 시 중의 하나... 오랜 동안 잊고 있었지만, 어제 우연히 이 시집을 들춰보다가 기억해내었다. 이 결심을 잊지 말걸...

- 060312일
written by JS 0603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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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にも負けず     비에도 지지 않고
             - 宮澤賢治 -     - 미야자와 켄지 -

雨にも負けず 風にも負けず                          
雪にも夏の暑さにも負けぬ                            
丈夫な體を持ち                                          
欲はなく決して怒らず いつも靜かに笑っている
一日に玄米四合と みそとすこしの野菜を食べ  
あらゆる事を自分を勘定に入れずに                
よく見聞きし分かり そして忘れず                  
野原の松の林の陰の 小さな茅葺きの小屋にいて
東に病氣の子ともあれば 行って看病してやり  
西に疲れた母あれば 行ってその稻の束を負い  
南に死にそうな人あれば                            
行って恐がらなくてもいいと言い                
北にけんかや訴訟があれば                          
詰まらないからやめろと言い                      
日照りの時はなみだを流し                          
寒さの夏はおろおろあるき                        
皆に木偶の坊と呼ばれ                                
ほめられもせず                                        
苦にもされず そういうものに                      
私はなりたい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고
욕심은 없으며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을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보고 듣고 행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솔숲 그늘 삼간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가 있으면 가서 간병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사소한 일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 때는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벌벌 떨며 걷고
모두에게 멍텅구리라 불리고
칭찬도 받지 않고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

미야자와 겐지는 이와테 현 하나마키 시에서 헌 옷가게와 전당포를 경영하는 미야자와 머사지로(宮澤政次郞)의 장남으로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마사지로는 자산가로 南無阿彌陀불를 외면 극락 왕생한다는 정토종의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겐지는 어려서부터 불교에 친숙했으며, 후에 법화경을 접하고 나서는 도쿄에 상경하여 불교단체인 고쿠추카이(國柱會)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정토종과는 교파가 다른 일연종에 심취하여서 부모와 많은 갈등을 빚게됩니다.    

 

종교적인 심성에 사로잡힌 겐지는 그 당시로서는 아주 희귀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즉 그는 법화경의 신자로 자기희생과 타인을 위한 사랑으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도쿄에서 귀경하는 그의 짊은 트럭 가득 책이나 습작으로 채워져 있을 정도의 개인적인 문학활동과 함께 실생활에서의 활동이 그러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극도로 절제하는 생활과 스스로 농사를 짓고 농민에게 농사법을 지도하고, 농촌의 청년들과 악단이나 극단을 만들어서 지도하는 등,전신전력을 기울여 향토에 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가난한 농촌을 위하여 여러 가지 농사법을 개발하는 등 향토운동가로서도 왕성하게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학창시절에는 농학을 전공하면서 주로 단가(短歌)를 창작하였으며, 1918년 경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합니다. 독자적인 개성을 가진, 무명의 농촌 시인인 겐지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 후로, 당시의 구사노 신페이(草野心平)나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등이 소개하면서입니다. 그는 농민적 발상과 종교적 인간애를 법화경적인 우주관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한 『春と修羅』의 시 외에도 특이한 동화 작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미야자와 켄지의 작품의 매력은 작품 전체의 구성과 테마, 이야기의 진행은 물론이고, 외면당하던 동북지방의 방언을 사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단어 하나 하나가 자연과의 교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시「비에도 지지 않고」는, 도쿄에서 병에 걸려 귀경하여 보낸 병상생활의 기록을 가타카나로 수첩에 메모한 것입니다. 11월 3일이라는 날짜만 적혀있고 제목이 없어서 시의 첫 행을 제목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의 내용은 주위에 대한 배려와 검소한 생활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겐지 자신의 생활양식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단지, 태평양전쟁 때 군부가 국민들에게 근검절약을 강요하는 교육방편(一日に玄米四合를 二合로 바꾸어)으로 널리 이용하였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리고, 겐지의 시에는 대부분의 경우 날짜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시의 성립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구상한 시기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雨ニモマケズ

雨ニモマケズ

風ニモマケズ    

雪ニモ夏ノ暑サニもマケヌ        

丈夫ナカラダヲモチ        

慾ハナク

決シテ瞋(いか)ラズ      

イツモシヅカニワラツテヰル      

一日二玄米四合ト        

味噌ト少シノ野菜ヲタベ

アラユルコトヲ          

ジブンヲカンジヨウニ入レズニ            

ヨクミキキシワカリ      

ソシテワスレズ

野原ノ松ノ林ノ蔭ノ      

小サナ萱ブキノ小屋二ヰテ        

東二病氣ノコドモアレバ  

行ツテ看病シテヤリ

西二ツカレタ母アレバ    

行ツテソノ稻ノ束を負ヒ  

南二死二サウナ人アレバ

行ツテコハガラナクテモイイトイヒ  

北二ケンクワヤソシヨウガアレバ

ツマラナイカラヤメロイヒ        

ヒデリノトキハナミダヲナガシ            

サムサノナツハオロオロアルキ

ミンナニデクノボウトヨバレ      

ホノラレモセズ          

クニモサレズ    

サウイフモノニ          

ワタシハ        

ナリタイ                                               (新潮文庫本)

시 「영결의 아침」은, 1923년 11월 27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이 날은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인 도시가 죽은날입니다. 종교적으로 아버지와 갈등을 빚던 겐지의 신앙을 이해해 준 가족은 여동생밖에 없었기에 겐지의 충격은 대단하였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여동새에 대한 애틋한 정을 시로 승화시킨 것인「영결의 아침」으로, 겐지의 생전에 간행된 유일한 시집인 「봄과 아수라」의 제一집 중에 대표적인 시이며, 일본 근대 명작시의 한 편이기도 합니다.

시의 구성은 여동생이 임종하려는 날의 하늘 모양을 시작으로 진눈깨비를 떠다 주세요<あめゆじゅとてちてけんじゃ>라는 여동생의 말을 후렴으로 하는 전반부와 소나무 가지에서 눈을 떠온 공기에 빗댄 상념과 기원을 중심으로 한 후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처음 두 행의 <けふのうちにとほくへいってしまふわたくしのいもうとよ>에서 보이는 발상이 아주 독특하다고 하겠습니다. 즉 <とほくへいってしまふ>라고 여동생의 죽음을 표현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다른 공간, 영혼이 윤회하여 다른 세계에 환생한다는 겐지의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永訣の朝

けふのうちに    

とほくへいつてしまふわたくしのいもうとよ        

みぞれがふつておもてはへんにあかるいのだ        (あめゆじゆとてちてけんじや)

うすあかくいつそう陰慘な雲から  

みぞれはびちよびちよふつてくる   (あめゆじゆとてちてけんじや)

靑い蓴菜のもやうのついた        

これらふたつのかけた陶碗(とうわん)に            

おまへがたべるあめゆきをとらうとして            

わたくしはまがつたてつぽうだまのやうに

このくらいみぞれのなかに飛びだした              (あめゆじゆとてちてけんじや)

蒼鉛いろの暗い雲から    

みぞれはびちよびちよ沈んでくる  

ああとし子

死ぬといふいまごろになつて      

わたくしをいつしやうあかるくするために

こんなさつぱりした雪のひとわんを        

おまへはわたくしにたのんだのだ

ありがたうわたくしのけなげないもうとよ  

わたくしもまつすぐにすすんでいくから             (あめゆじゆとてちてけんじや)

はげしいはげしい熱やあえぎのあひだから  

おまへはわたくしにたのんだのだ

銀河や太陽 氣圈などとよばれたせかいの  

そらからおちた雪のさいごのひとわんを……


……ふたきれのみかげせきざいに  

さびしくたまつたみぞれである

わたくしはそのうへにあぶなくたち        

雪と水とのまつしろな二相系(にそうけい)をたもち

すきとほるつめたい雫にみちた    

このつややかな松のえだから      

わたくしのやさしいいもうとの

さいごのたべものをもらつていかう        

わたくしたちがいつしよにそだつてきたあひだ

みなれたちやわんのこの藍のもやうにも            

もうけふおまへはわかれてしらふ     (Ora Orade Shitori egumo)

ほんたうにけふおまへはわかれてしまふ            

あああのとざされた病室の

くらいびやうぶやかやのなかに            

やさしくあをじろく燃えてゐる      

わたくしのけなげないもうとよ

この雪はどこをえらばうにも      

あんまりどこもまつしろなのだ            

あんなおそろしいみだれたそらから

このうつくしい雪がきたのだ      

(うまれでくるたて        こんどはこたにわりやのごとばかりで       くるしまないよにうまれてくる)

おまへがたべるこのふたわんのゆきに      

わたくしはいまこころからいのる

どうかこれがと卒の天の食に變つて          

やがておまへとみんなとに        

聖(きよ)い資糧(かて)をもたらすことを

わたくしのすべてのさいはひをかけてねが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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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의 아침

미야자와 켄지


오늘 중으로

먼 곳으로 떠나 버릴 내 누이여

진눈깨비가 내려 밖은 불길하게 밝다

           (진눈깨비를 떠다 주세요)

조금 밝고 한층 음산한 구름에서

진눈깨비는 추적추적 내려온다

           (진눈깨비를 떠다 주세요)

푸른 순채 모양이 그려진

이 두 그릇 이 빠진 도기 그릇에

네가 먹을 진눈깨비를 뜨러

나는 쏜살같이

어두운 진눈깨비 속으로 뛰어들었다

         (진눈깨비를 떠다 주세요)

어두운 구름으로부터

진눈깨비는 추적추적 내려온다

아, 도시코여

죽음을 앞둔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평생 맑게 하려고

이런 산뜻한 눈 그릇을

너는 내게 부탁했다

고맙다 나의 다정한 누이여

나는 바로 살아가겠다

       (진눈깨비를 떠다 주세요)

고열과 신음으로 괴로워하며

너는 나에게 부탁했다

  은하나 태양 그리고 대기권 세계의

하늘에서 내린 눈의 마지막 한 그릇을……

……두 덩어리의 화강암에

진눈깨비는 쌓여 있다

나는 그 위에 불안하게 서서

눈과 물의 두 가지 상태를 유지하며

투명하고 찬 물방울이 가득 매달린

이 반들거리는 소나무 가지에서

나의 상냥한 누이의

마지막 음식을 갖고 가자

우리가 함께 자라 온 동안

눈익은 밥그릇의 쪽빛 무늬에도

이제 오늘 너는 이별을 고한다

(나는 나 홀로 떠납니다)

정말로 오늘 너는 이별을 고한다

아, 닫혀진 병실의

어두운 병풍이나 모기장 속에서

부드럽고 창백하게 불타고 있는

나의 다정한 누이여

이 눈은 어디를 고르더라도

아주 어디나 새하얗다

저리 무시무시하게 흐린 하늘에서

이 아름다운 눈이 내려왔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때는

          이렇게 자신의 일만으로

          괴로워하지 않게 태어나겠습니다)

네가 먹는 이 두 그릇의 눈에

나는 지금 진정으로 기원한다

부디 이것이 천상의 아이스크림이 되어

너와 모두에게 정갈한 음식이 되도록

나의 모든 행복을 바치어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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