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영화에 너무 빠져 산 것 같아서 조금 자제하려고 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보는 시간이 아까웠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셋이 함께 길을 걸어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한 명 있다는 말처럼, 명작이든 범작이든, 심지어 졸작이라도 되새겨 볼만한 점들은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책도 물론 마찬가지이고,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영화를 보면 그런 되새김의 시간 없이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넘긴 듯한 더부룩한 느낌이 난다. 차라리 안보느니만 못하다는 결론. 그러던 중 이번에는 시사회 이벤트에 당첨되었다. 제목은 '그해 여름', 예전에 좋아했던 강타의 '그해 여름'이란 곡이 생각나서 이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런 경사가!
나는 슬픈 사랑을 오랜 동안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굉장히 진지하게 보는 편이다. 동감, 클래식... 이런 류의 영화는 어떻게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끝없이 변주되는데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슬픈 이야기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객관적이려 노력해도 냉정하게 감상을 적기가 쉽지가 않다.
'번지 점프를 하다'나 '달콤한 인생'을 재미있게 보았기 때문에 이병헌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수애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싫어할 이유는 없었지만 왜 예쁘다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그랬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좋은 모습을 보려고 노력하면서 봤다.
모든 젊은이들이 박정희 정권하의 시국을 논하고 미국인이 최초로 달에 착륙한 1969년, 시국에 관심도 없고 매일 술만 퍼먹는 찌질한 대학생 석영은 친구의 강권으로 수내리라는 마을에 농활을 가게 된다. 모기때문에 한숨도 못잔 다음날 아침, 우연히 노랫 소리에 이끌려 정인을 만나게 되고 까칠하면서도 순진한 그녀에게 점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정인은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농활 기간동안 정인과의 풋풋한 추억을 쌓아가며 그녀에게 빠져든 석영은 그녀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오지만, 암울한 시대 상황이 둘을 행복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영화는 소설 '소나기'와 영화 '동감'과 '클래식'의 요소들을 섞어놓은 듯 하달까. 초반에 코믹스럽게 관객들의 주의를 잡아놓고 시간이 전개될수록 가슴 아프게 하는 요즘 멜로의 공식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병헌(윤석영 역)을 좋아하는 여자 관객이라면, 아니 남자 관객이라도 아주 자지러질 정도로 이병헌의 연기는 괜찮았고, 또 망가지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수애(서정인 역) 역시 캐릭터 설정상 망가질 정도는 아니지만, 재미있고 예쁘게 보았다. 특히, 그녀가 은근히 중독성 있는 노래.
개나리 고오~개는 눈물의 고개
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정말 쓰러졌다(이 노래가 얼마나 중독성이 있는지는 영화를 보다보면 안다). 뿐만 아니라 오달수(석영의 친구), 정석용(마을 아저씨) 등 조연들의 연기도 영화 중간 중간 배꼽을 잡게 한다. 영화의 끝 부분은 수애의 나레이션이 아니라, 조금 상투적이더라도 편지 같은 것을 이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 감정이 고조되어 절정에 달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눈물이 찔금 날 정도였는데 말미 부분 때문에 웬지 다시 맥없이 늘어지는 듯한 느낌.
남북 분단과 군사 정권이라는 시대 상황이 얼마나 슬픈 비극들을 만들어냈을까. 비록 '그해 여름'의 이야기는 영화 스토리지만 웬지 있음직하다. 서울에서의 석영의 찌질한 행동을 보면서 화가 나려고 했다가도, 과연 어떤 편이 둘을 위해 더 나았을까 생각해보니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70년대에 바침'이라는 곡의 가사처럼, 무엇이 옳았었고 틀렸었는지 그때는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
너무 예쁜 시골을 담은 영상과 주, 조연을 막론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특히 이병헌의 망가지는 연기는 다시 말하건데, 정말 일품이었다. 이병헌은 드라마보다 영화에서의 모습이 더 낫다.
◆ 영화에서 가장 예뻤던 장면은 읍내 시장길을 알려달라는 핑계로 버스를 타고 나온 석영과 정인이 레코드점 턴테이블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려고 유리창에 귀를 대고 듣던 장면. 눈을 감고 듣던 수애가 눈을 뜨면 이병헌은 눈을 감아버리는 쌍팔년도 장난이지만, 그렇게 예뻐 보일수가 없었다.
◆ 마을 사람들이 미국인이 달에 착륙하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신기해하던 날 석영과 정인이 앉아있던 연꽃 연못도 정말 눈부시게 예쁜 장면이었다. 어디서 찍은 걸까, 정말 한 번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