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 영화가 개봉한다고 할 때부터 단지 라디오가 들어가는 제목과 최정윤이 나온다는 사실에(...>.<) 보고싶다고 생각했었지만, sparkstar님의 리뷰에 결정적으로 꽂혀버려 관람했던 영화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참 웃으면서, 찡하게 봤는데 주말에 TV에서 다시 해준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여동생과 다시 한 번 봤습니다. 아무래도 영화관보다 작은 화면이다보니 생생함은 덜했지만 아, 그래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자기가 찍고 싶은 영화를 언제나 콕콕 찝어 찍을 수 있는지 그 바닥을 잘 몰라서 모르겠지만, 제가 봤던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이 감독은 스러져 가는 것들, 몰락해 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황산벌에서는 백제의 몰락을 그렸고, 왕의 남자에서는 시대적으로는 연산군의 몰락과 우리 시대와 관련해서는 전통 문화의 상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라디오스타에서는 제목 그대로 오디오의 몰락과 특히 락 및 밴드의 쇠퇴를 아쉬워하는 듯 하네요.
중간중간에 삽입된 정말 옛날 노래같지 않은 세련된 노래인 비와 당신을 들으며, 그리고 영화 내내 "안녕하세요. 88년도 가수왕 최곤입니다"로 자신을 소개하는 박중훈을 보면서 정말 88년도 가수왕이 최곤이었나? 찾아봤더니 아니더군요. ㅡㅡ;; 제가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상당히 많이 들었던지라 88년도 가수왕의 노래 정도면 한 번정도는 들어봤어야 정상인데 전혀 기억에 없었거든요. 88년에는 주현미씨가 신사동 그 사람 이라는 노래로 가수왕을 차지했다고 합니다(네이버 지식in 참고). 최곤이 방송 중에 말하던 경쟁자들, 이승철, 이남이, 박남정씨 등에 관한 내용은 사실이더라구요.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사람보다야 겉으로는 물론 나아보이겠지만, 한 단계 자신의 목표를 이룬 사람은 그 성공때문에 치루어야 할 대가가 분명 존재합니다. 이건 로마인 이야기 2권의 마지막 부분에도 나오는 문장이지요. 최곤(박중훈)은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지만 88년도 한 번의 가수왕의 희열을 잊지 못하는, 그리고 밴드를 하던 자신을 꼬셔 가수의 길로 이끈 오랜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뒤치닥거리를 아무 거리낌없이 받는 철부지입니다. 대마초 사건에 걸려들어 카페에서 스테이지나 채우는 신세지만 자신이 아직도 스타라고 믿고, 다시 재기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삽니다. 그런 최곤은 카페에서의 폭행건 때문에 유치장 신세까지 지게 되고 합의금을 구하기 위한 민수의 노력 덕에 강원도 영월에서 12시 프로 DJ를 맡게 됩니다. 물론 자신이 아직 스타 가수라고 생각하는 최곤이 지방에서 DJ나 하는걸 달가워할 리 없죠. 여기에 원주에서 방송 사고를 치고 잠시 쫓겨내려온 여PD 강석영(최정윤)이 가세하면서 콩가루 방송(?)이 시작됩니다.
선곡표 무시, 원고 무시의 대책 없는 DJ에 매니저 민수만 신났을 뿐, PD도 지국장도 포기한 방송 진행도 모자라 최곤은 급기야 다방 커피까지 방송 부스 안으로 배달시키지만, 졸지에 즉석 게스트가 된 커피 배달부 김양의 엄마에게 띠우는 사연이 영월 주민들의 눈물을 적시고 거기에 최곤의 꾸밈없고 천방지축인 진행이 신선하다는 호응을 얻으면서 방송은 인기 폭발, 급기야는 서울에서 전국 방송을 앞두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미 가요계를 장악하고 있는 상업주의의 마수는 최곤에게도 예외없이 손을 뻗치기 시작합니다. 최곤과 민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런지...
솔직히 영화는 관심을 확 끌만한 러브 스토리나 갈등도 없고 대충 보면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솔직히 말해 어떨 때 보면 얄미운 다큰 철부지 최곤역을 자연스레 연기한 박중훈과 오버스런 연기로 웃음을 자아내는 안성기의 연기 빼고는 볼 게 없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유난히 제 마음을 끄는건 제가 아마 라디오 전성 시대의 끄트머리에 학생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겁니다. TV보다 공부하면서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더 친숙해 밤 늦게까지 라디오를 들으며 울고 웃었던, 정말 쟁쟁한 스타들은 TV만큼이나 라디오에 앞다퉈 출연해서 더 진솔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해야 뜬다고 생각했던 시대이지요. 오디오가 비디오에 비해 경쟁력이 그다지 뒤지지 않았습니다.
민수가 천문대에서 최곤에게 하는 명대사,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별은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라는 대사는 참 멋질 지 몰라도 이 영화를 버디 영화가 아니라 옛것의 몰락을 아쉬워하는 영화로 본 제게는 그다지 남지 않는 대사입니다. 전 오히려 민수가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최곤을 위해서울로 떠났던 민수가 비오는 날 양복을 빼입고 우산을 기타 삼아
띵가딩가띵띠리리리링~ 한번 보고 두번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라고 신중현의 미인을 부르며 나타나죠. 그리고는 자신의 백을 최곤에게 던집니다. 깜짝놀란 최곤은 엉겁결에 백을 잡기 위해 비속으로 뛰어들다가는 당했다 싶었는지 다시 백을 휙 팽개쳐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안성기는 자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최곤에게 우산을 씌워주죠.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둘 사이의 화해와 미래를 이렇게 단 몇 컷으로 깔끔하면서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둘은 다시 가수로서의 부활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내디딜 겁니다. 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비가 내리는 질퍽한 세상이라 해도 말이죠. 하지만 저는 이 마지막 컷이 완전한 해피엔딩이라던 친구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둘이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스타의 자리로 돌아가기는 힘들겁니다. 이미 그들의 시대는 지났으니까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테지만 그래도 그 비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둘의 엔딩컷을 보면서 역시 희망이란 가장 달콤한 마약과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만의 별점 ★★★★☆
배우로서의 박중훈과 안성기, 극중 인물로서의 최곤과 민수의 유사성에 관한 내용은 sparkstar님의 리뷰를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라디오스타에 관한 리뷰를 몇 개 읽어본 중에 이처럼 날카로운 지적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