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L. Log/나만의 지식 KIN'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07.01.28 Luxury
  2. 2007.01.24 연설, 강연,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의 지침 2
  3. 2006.11.22 윤동주 연보
  4. 2006.09.30 [링크/요약] 전략이란 무엇인가 10
  5. 2006.09.30 MAYA론
  6. 2006.09.21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18
  7. 2006.09.19 트로이 전쟁 당시의 그리스 역사 3
  8. 2006.09.07 You are the apple of my eye. 4
  9. 2006.08.27 명왕성 개론? 16
  10. 2006.07.16 비와 번개와 천둥 소리 4

Luxury

L. Log/나만의 지식 KIN 2007. 1. 28. 21:15
이 글은 luxury라는 단어에 대한 언어학적인 고찰이 아니라, 개인적인 흥미에 따른 단상임을 미리 밝힙니다. 하지만 포스트에 오류가 있다면 정정 피드백 기꺼이, 고맙게 받겠습니다.

예전에 자주 갔던 레스토랑 중에 '럭서'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있었다. '럭서? 럭서가 뭘까?' 잠깐 궁금해하다가는 잊어버리곤 했는데, 왜 그 레스토랑의 인테리어가 이집트 풍인지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바보... 고등학교, 대학교 초학년 그런 시절이라 그런 것 생각할 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후에야 우연히 그 레스토랑의 간판을 제대로 보았고 그제서야 간판에 영단어로 Luxor라고 써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그때까지 그 레스토랑의 간판은 한번도 보지 않고 럭서 하면 어느 건물, 몇층으로만 알고 있었던 거다. OTL...

얼마전 친구와 럭셔리함에 대한 심오한(실은 머리는 비었고 겉멋만 든 사람 흉보는...ㅇㅇ;;) 대화를 나누다가 luxury라는 단어가 혹시 이집트의 도시 Luxor(룩소르)에서 나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영영 사전에서 찾아본 luxury의 어원은 라틴어 luxuria이다. 그런데 자세한 점은 좀더 찾아봐야 하겠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동방에 있는 오리엔트 문명, 특히 이집트 문명에 항상 열등감 내지는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각주:1]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그리스인들의 탐욕스러움에 대해 넌지시 언급한 바 있지만, 그리스와 로마인들에게는 저 빛나는 태양의 이집트 문명이 사치스러움과 부유한, 그저 정복과 약탈의 대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문명이 꽃피던 룩소르라는 도시를 그저 럭셔리한 도시로밖에 볼 수 없지 않았을까?

고도의 문명을 물질적인 부유함의 잣대로로밖에 판단할 수 없는 그리스, 로마인들의 후예들인 서구인들에게서 탄생한 저 자본주의가 물질 만능 주의를 낳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수량화하고 물질로밖에 재단할 수 없는 사고방식, 보이지 않는 머리에 든 것보다 보이는 외모와 겉치장에 충실하는 경향. 이런 것들이 과도함(excess)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luxury라는 단어에 녹아있는지도 모른다.
  1. 이점은 그리스 신화의 이오의 이야기나, Europe(유럽)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에우로파 등의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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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한결 줄었지만 연설, 강연이나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와 관련하여 요 며칠 사이 정말 공감이 딱 가는 포스트 두 개를 발견했다.

#1

저 포스트 링크의 기조연설 관련 책 출판사 리뷰에 나오는 "프레젠테이션, 하나의 완벽한 드라마로 만들어라" 부분은 내가 평소 지론처럼 여기는 점이다. 정보를 제공하되 너무 지루하거나 딱딱해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해서 주의를 잡는데 치중하는 나머지 주제를 벗어나거나 품위가 떨어지면 안된다. 예술을 창작하듯 - 비발디의 사계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각론적으로 특히 공감이 가는 항목들은 컬러로 강조한 부분이다.

Chapter 01 오프닝을 장악하라
Chapter 02 큰 그림을 먼저 이야기 하라
Chapter 03 옛 것을 비난하지 마라
Chapter 04 프레젠테이션은 구조가 핵심이다
Chapter 05 나를 위한 무엇이 담겨 있는가?
Chapter 06 믿게 만들려면 입증하라
Chapter 07 즐거운만큼 성공한다
Chapter 08 현장에 제품을 가져가라
Chapter 09 현명하게 비교하라
Chapter 10 가격을 제시하는 특별한 스킬
Chapter 11 차트는 숫자가 아니라 그림이다
Chapter 12 제3자를 통해 보증을 받아라
Chapter 13 뉴스가 될 만한 것만 이야기하라
Chapter 14 한 장의 그림이 천 마디 말을 대신한다
Chapter 15 청중의 신발을 신고 보라
Chapter 16 멀티미디어를 정복하라
Chapter 17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스킬
Chapter 18 가장 좋은 것을 마지막에 보여 줘라
Chapter 19 열정이 없으면 실패한다
Chapter 20 항상 되짚어 주고, 요약하라
Chapter 21 프레젠테이션은 드라마다
Chapter 22 보너스는 언제나 기분 좋다
Chapter 23 감동적인 마무리를 준비하라
Chapter 24 청중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라
Chapter 25 파워포인트를 다시 생각 한다
Chapter 26 스티브잡스와 빌게이츠의 프레젠테이션
Chapter 27 세상에 너무 많은 리허설이란 없다
Chapter 28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이 남긴 것
Chapter 29 마지막 이야기

#2

결론부터 짧게, 그리고 중간보고를 하라. 제가 예전에 '보고'에 대해 경제노트에 쓴 글의 요약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중견기업의 CEO로 있는 친구가 정해놓고 실행하고 있다는 보고의 몇가지 원칙을 소개한 글이 있더군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라. 단문으로 이야기하라. 한 장으로 요약하라." 보고를 위한 보고,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과를 내기 위한 보고,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되려면 반드시 지켜야할 보고의 원칙. "결론부터 짧게, 수시로 중간보고를 하라"라는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보고할 때 중요한 점이지만, 연설이나 프리젠테이션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3
윗 내용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내가 특히 중요시하는 점들을 꼽자면
  1. 명문에서 좋은 강연, 연설이 나오며, 또한 당일의 자신감을 준다. 원고를 세심하게 준비하라.
  2. 리허설 또는 연습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심한 경우 원고를 외울 정도로까지 준비해야 하지만 결코 세세한 표현까지 외워서는 안된다. 그런 것들은 그날의 순발력에 맡겨라.
  3. 품위있는 언어는 연습에서 나오지 않는다. 평소의 언어 습관이 중요하다.
  4. 연습할 때는 연습의 중요성이 절대적이라 믿어야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준비는 70% 그 날의 환경, 컨디션과 순발력이 30%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 30%를 결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5. 청중을 지루하게 해서는 안되며, 반대로 흥미를 끄는 나머지 품위를 떨어뜨려서도 안된다. 시간 내내 하품이나 폭소보다는 미소를 띠게 해야 한다.
  6. 청중의 귀만큼이나 눈을 즐겁게 해야 한다. 꼭 시각적인 자료만이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지 않은 표정과 몸짓으로도 가능하다.
  7. 연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요점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청중의 머리 속에 개략도를 그려주어야 한다. 또한 요점이 너무 많으면 안된다.
  8. 시간을 남기면 남겼지 초과해서는 안된다. 그 실수 하나로 그 시간을 위한 수많은 준비와 그 날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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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정판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 세계사)

1917년(1세)
12월 30일에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2), 모친 김용(金龍, 1891~1948)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본관 파평. 아명은 해환(海煥).당시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은 부유한 농부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보다 석 달 전인 9월 28일에는 고종사촌인 송몽규(宋夢奎, 1917~1945)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태어났다(아명은 韓範, 부친 宋昌義, 모친 尹信永). 윤동주와 송몽규는 둘 다 기독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윤동주의 호적을 비롯한 각종 공식 기록에 그의 출생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1923년(7세)
9월, 부친 윤영석은 관동 대지진 당시 동경에 유학중이었다.

1924년(8세)
12월, 누이 혜원(惠媛, 아명 貴女) 태어나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 및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이 있었다.

1927년(11세)
12월, 동생 일주(一柱, 아명 달환) 태어나다.

1928년(12세)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을 정기구독 시작. 송몽규는 『어린이』를 정기구독. 그들이 다 읽은 후 동리아이들이 빌려서 읽음. 명동에 공산주의 만연.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다.

1929년(13세)
4월,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형태에서 <인민학교>로 넘어갔다가 9월에는 중국 행정당국에 의해 공립으로 강제수용되다. 외삼촌 김약연 평양 장로교 신학교 입학.

1930년(14세)
김약연 1년 수학 후 목사가 되어 명동 교회 부임. 명동에 공산테러 성행.

1931년(15세)
3월 20일, 명동 소학교 졸업. 송몽규, 김정우 외 1명과 함께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대랍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이 해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

1932년(16세)
4월, 용정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하다.
부친 인쇄소 차렸으나 사업이 부진하다.

1933년(17세)
4월, 동생 광주(光柱) 태어나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인 시 3편을 제작 기일 명기하여 보관 시작
시 「초한대」(12. 24),「삶과 죽음」(12. 24)「내일은 없다」(12. 24)

1935년(19세)
1월 1일,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꽁트 부문에 「술가락」이 아명 <宋韓範>이란 이름으로 당선.
4월, 송몽규, 학업 중단하고 중국 낙양 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러 중국으로 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윤동주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 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으로 들어가다.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 간행의 학우지 『숭실활천』 제 15호에 시 「공상」 게재, 최초로 작품 활자화되다.
시 「거리에서」(1. 18), 「空想」(『 崇實活泉』 10월), 「蒼空」(10. 20), 「南쪽 하늘」(10)
동시 「조개껍질」(12)

1936년(20세)
3월,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퇴.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문익환은 5학년에 편입.
4월,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송몽규가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 압송되어 고초를 겪다.
9월 14일에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된 후 계속 요시찰인으로 감시당하다.
동시 「고향집」(1. 6), 「병아리」(1. 6)(『카톨릭 소년』 11월호 발표), 「오줌싸개지도」(『카톨릭 소년』 1937년 1월호 발표), 「기왓장내외」
시 「비둘기」(2. 10), 「離別」(3. 20), 「食券」(3. 20) 「牧丹峰에서」(3. 24), 「黃昏」(3. 25), 「가슴 1」(3. 25), 「종달새」(3), 「山上」(5), 「午後의 球場」(5), 「이런 날」(6. 10), 「양지쪽」(6. 26), 「山林」(6. 26), 「닭」(봄), 「가슴 2」(7. 24), 「꿈은 깨어지고」(7. 27), 「谷間」(여름), 「빨래」.
동시 「빗자루」「햇비」「비행기」
시 「가을밤」(10. 23)
동시 「굴뚝」(가을), 「무얼 먹고 사나」(10)(『카톨릭소년』 1937년 3월호 발표), 「봄」(10), 「참새」(12), 「개」, 「편지」, 「버선본」(12월초), 「눈」(12),「사과」, 「눈」, 「닭」
시 「아침」
동시 「겨울」(겨울), 「호주머니」(1936년 12월호, 또는 1937년 1월호 발표)
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1월호), 「빗자루」(12월호)를 발표할 때 <尹童柱>란 필명 사용.

1937년(21세)
4월, 졸업반인 5학년으로 진급.
송몽규는 대성중학교(4년제) 4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업 재개.
8월, 백석 시집 『사슴』을 배껴 필사본을 만들어 가지다. 이 무렵 광명중학교 농구선수로 활약.
9월,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 등지로 수학여행.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과 심하게 대립, 결국 조부의 개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연전 문과>에 진학하기로 결정되다.
시 「黃昏이 바다가 되어」(1)
동시 「거짓부리」(『카톨릭 소년』 10월호 발표), 「둘 다」, 「반딧불」
시 「밤」(3)
동시 「할아버지」(3. 10), 「만돌이」, 「나무」
시  「장」(봄), 「달밤」(4. 15), 「風景」(5. 29), 「寒暖計」(7.1), 「그女子」(7. 26), 「소낙비」(8. 9), 「悲哀」(8. 18), 「瞑想」(8. 20), 「바다」(9), 「山峽의午後」(9), 「毘盧峰」(9), 「窓」(10), 「遺言」(10. 24)(『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 23일자 발표)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4월 9일, 서울 연전 문과 입학. 대성중학교 4학년을 졸업한 송몽규도 함께 입학하다. 연전 기숙사 3층 지붕 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인이 한방을 쓰면서 연전생활 시작
시 「새로운 길」(5. 10)(학우회지『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비오는 밤」(6. 11), 「사랑의 殿堂」(6. 19), 「異蹟」(6. 19), 「아우의 印象畵」(9. 15)(『조선일보』 학생란 발표. 1939년 추정), 「코스모스」(9. 20), 「슬픈 族屬」(9), 「고추밭」(10. 26)
동시 「햇빛 · 바람」「해바라기 얼굴」「애기의 새벽」「귀뚜라미와 나와」「산울림」(5)(『소년』 1939년 발표).
산문 「달을 쏘다」(10)(『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호 발표)

1939년(23세)
연전 문과 2학년으로 진급.
기숙사를 나와서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 북아현동에서 살 때,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을 방문,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월), 시 「유언」(2. 16), 「아우의 인상화」(날짜 미상)를 윤동주(尹東柱) 및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 동시 「산울림」을 『少年』(날짜 미상)에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 『문장』『인문평론』을 매달 사서 읽다.
시 「달같이」(9), 「薇 병들어」(9), 「투르게네프의 언덕」(9), 「산골물」, 「自畵象」(9)(학우회지 『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少年」

1940년(24세)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다. 고향 후배인 장덕순 연전 문과 입학. 같이 입학한 하동 출신 정병욱(1922~1982)과 깊이 사귀다.
1939년 9월 이후 주욱 절필하다가 이해 12월에 가서 3편의 시를 쓰다.
시 「八福」(12월 추정), 「慰勞」(12. 3), 「病院」(12)

1941년(25세)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생활 시작.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집 옮기다.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전 4년을 졸업하다.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다.
시 「무서운 時間」(2. 7), 「눈오는 地圖」(3. 12), 「太初의 아침」「또 太初의 아침」(5. 31), 「새벽이 올 때까지」(5), 「十字架」(5. 31), 「눈 감고 가다」(5. 31), 「못 자는 잠」「돌아와 보는 밤」(6), 「看板없는 거리」「바람이 불어」(6. 2), 「또다른 故鄕」(9), 「길」(9. 30), 「별헤는 밤」(11. 5), 「序詩」(11. 20), 「肝」(11. 29)
산문 「終始」

1942년(26세)
연전 졸업 후 일본에 갈 때까지 한달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부친 일본 유학 권하다. 키에르케고르를 탐독. 졸업증명서, 도항증명서 등 도일수속을 위해 1월 19일에 연전에 <平沼東柱>라고 창씨한 이름을 계출하다. 1월 24일에 쓴 시 「懺悔錄」이 고국에서 마지막 작품이 되다.
3월에 일본에 건너가서 4월 2일에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송몽규는 <宋村夢奎>라고 창씨한 이름으로 도일하여 4월 1일에 경도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입학.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했다가 동북제국대학 편입을 목표로 급히 도일. 그러나 동북제대로 가지 않고 10월 1일에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 무전 아파트에서 하숙생활.
시 「懺悔錄」(1. 24), 「흰 그림자」(4. 14), 「흐르는 거리」(5. 12), 「사랑스런 追憶」(5. 13), 「쉽게 씌어진 詩」(6. 3), 「봄」<연대미상작품>
산문 「별똥 떨어진 데」「花園에 꽃이 핀다」

1943년(27세)
1월, 경도에 와서 맞은 첫 겨울방학에서 귀성하지 않고 경도에 남다.
7월 10일, 송몽규 특고경찰에 의해 경도 하압경찰서에 독립운동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윤동주, 고희욱도 검거되다.
소식을 듣고 동경에서 면회간 당숙 윤영춘이 윤동주가 <고오로기>란 형사와 대좌하여 그가 쓴 우리말 작품과 글들을 일역(日譯)하고 있는 것을 목격. 외사촌 김정우도 면회.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검찰국에 송국되다.

1944년(28세)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2 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2년(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일, 출감예정일 1945년 11월 30일).
4월 13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1 형사부는 송몽규에서 <징역2년>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7일, 출감예정일: 1946년 4월 12일).
이들은 판결 확정 뒤에 복강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 시작.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1945(29세)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복강형무소 안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
2월 18일, 북간도의 고향집에 사망통지 전보 도착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가져오려고 도일, 복강 형무소에 도착하여 먼저 송몽규를 면회해서,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동주가 그래서 죽었다는 증언을 듣다.
3월 6일,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
3월 7일, 복강형무소에서 송몽규 눈을 뜬 채 운명. 부친 송창희와 육촌동생 송희규가 도일하여 유해를 가져다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
봄이 되자 송몽규 가에서 <靑年文士宋夢奎之墓>란 비석을 해서 세웠고, 잇달아 윤동주 가에서도 <詩人尹東柱之墓>란 비석을 세운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조국이 해방되다.

1947년
2월 13일, 해방 후에 처음으로 유작 「쉽게 씌어진 詩」가 당시 주간이던 시인 정지용의 소개문을 붙여 『경향신문』 지상에 발표되다.
2월 16일, 서울 <플라워 회관>에서 첫 추도회 거행되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여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
5월, 5 · 10 제헌국회의원 선거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거

1955년
2월, 서거 10주년 기념으로 유고를 더 보충한 증보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정음사에서 출간되다. 이 증보판 시집부터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제외되었다. 그들이 납북인사 내지 좌익인사라는 혐의를 받는 걸 꺼린 것이다. 냉전시대의 비극적 상황의 한 단면이었다.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조도전대학의 대촌익부(大村益夫) 교수에 의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와 비석의 존재가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되다.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4월 5일에 북간도의 유지들이 명동 장재촌에 있던 송몽규의 묘를 용정 윤동주 묘소 근처로 이장하다.

1995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송몽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애국장>은 <독립장>보다 한 등급 아래 훈장이다.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판을 거듭하면서 계속 증보되었다.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다. 현재 윤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의 출간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들은 3백 편을 상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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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egy is the creation of a unique and valuable position, involving a different set of activities.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입니다. 거의 모든 기업이 생산성 프론티어 근처에 와 있는 현재,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트레이드오프를 통해서만 유니크한 위치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오래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 목표로 하는 고객층을 좁혀야 합니다. 어디를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회사인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어떤 회사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게 전략입니다. 이건 너무도 힘든 결정입니다. 누구나 모든 것을 다 잘 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베끼려면 모든 것을 통째로 베껴야 하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전략적 포지셔닝을 할 때 주의할 점
  1. 트레이드오프를 하지 않는 것의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
    -주로 사용되는 논리는 '경쟁회사가 이것을 채택하기 전에 먼저 하세요'
  2. '성장'의 유혹
    -성장이 한계에 도달했다면, 어떻게 현재의 전략적 위치를 더욱 심화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1. '누구나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어한다.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 아직도 이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도 마찬가지.
  2. 수확체증의 법칙과 연결 고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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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된 기사인데, 노트북에 묵혀두고 조사가 늦어서. ㅠ.ㅠ


디자이너 사회에는 'MAYA(Most Advanced, Yet Acceptable)론'이라는 게 있다.
"앞서 가되 구성원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20세기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레이먼드 로위의 명언이다.

개혁을 염두에 둘 때 언제나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논리가 아닐까.

  1. 방학 일주일 전에 방학 시간표를 짜놓고 아직 방학이 아니니 방학때까지 놀겠다는 학생보다, 시간표 없어도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더 낫다는 점.
  2. 게다가 현 정부는 전략의 부재 이전에 전략을 짜낼 씽크탱크가 없어 보인다는 점도.
  3. 그래도 이 MAYA론을 조중동이 지적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 한경이니까 그나마 수긍하면서 넘어가지, 조중동에서 저 MAYA론을 들고 나왔더라면 세기와 국경을 넘나든 코메디가 될 뻔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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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구글 개인화 홈페이지에 괜찮은 콘텐츠 추가할 것이 없을까 둘러보다가 오늘의 나사 이미지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미지들이 마음에 안들더군요. 그냥 행성이나 별 같은 자연만이 들어간 이미지를 원했는데, 꼭 인공적인 것이 들어가더라고요. 예를 들면 우주 상공의 왕복선 안에서 내려다 본 허리케인의 이미지인데 우주 왕복선의 윈도우가 한켠에 끼어드는 식의. 그래서 링크 사이트를 딸각거리다가 허블 공식 사이트 http://hubblesite.org/ 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F11키를 누르신 후, 이미지 좌측 상단의 이미지 확장 버튼을 누르시면 크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A Giant Hubble Mosaic of the Crab Nebula]



[Heart of the Whirlpool Galaxy (M51)]
This image of the center of the Whirlpool Galaxy shows visible light from starlight, and light from the emission of hydrogen. Bright star clusters, highlighted in red, shed light emitted by hydrogen atoms. Intricate "dust spurs" branch out around the main spiral arms.



[Iridescent Glory of the Helix Nebula]
This detailed picture of the Helix Nebula shows a fine web of filaments, like the spokes of a bicycle, embedded in the colorful red and blue gas ring around this dying star. The Helix Nebula is one of the nearest planetary nebulae to Earth, only 650 light years away.




[Rainbow Image of the Egg Nebula]
An onionskin-like structure of concentric dust shells surround a central, aging star. Twin beams of light radiate from the star and illuminate the usually invisible dust. Artificial colors show how light reflects off the particles and heads toward Earth.




[Double Clusters of Stars (NGC 1850)]
This "double cluster," NGC 1850, is located in the Large Magellanic Cloud. It consists of a large cluster of stars, located near a smaller cluster (below and to the right). The large cluster is 50 million years old; the other only 4 million years old. The cluster is surrounded by gas believed to be created by the explosion of massive stars.



생각 같아서는 이 블로그에 모조리 퍼담고 싶었지만, 티스토리에게 죄송한....^^; 제 생각에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이미지 다섯 장만 골랐습니다. 월페이퍼 용이라네요. 밤하늘을 봐도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모를 빛들이 드문드문 눈에 띠는 서울 하늘을 볼 때마다 씁쓸할 때가 많았는데, 가끔 이 포스트에 들러 천체 망원경의 꿈을 대신해야겠습니다. 아, 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우주를 보면 한낱 먼지같은 저인데요. 모든 사물 앞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 정말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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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 일리아스를 읽고 있습니다를 쓰면서 제가 착각했던 부분이 있네요. 그 당시의 그리스가 흔히 말하는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 시대처럼 도시국가들일 거라고 지레짐작 해버렸으니 ^^;

고대 그리스 / 위키 백과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 에게-미노아 문명
소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
B.C. 3000 청동기 돌입
B.C. 2000 선형 A 문자 사용, 미노아 문명의 전성기

2. 에게-미케네 문명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의 선조들이 주도한 문명
B.C. 2000년경부터 남하하여 그리스 본토에 자리잡고 원주민과 혼합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의 반도에 많은 소왕국을 건설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왕국 중 '황금의 미케네'로 일컬어질 정도로 맹주격(이 미케네 및 아르고스, 코린트의 왕이 아가멤논)
미케네는 미노아 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후 미케네가 에게 해의 패자가 된다.

3. 도리아 족의 남하
B.C. 12세기 그리스인의 마지막 이주자인 도리아족에 의하여 미케네 문명 몰락
미케네 사회 붕괴 후 그리스 본토에는 3개 내지 4개부족으로 구성된 소왕국 형성.
도리아족의 남하에 따른 혼란과 타국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 그 시기는 호메로스 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외도 많다.


여기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시기가, B.C. 기원전 1240~30년, 일설에는 기원전 1260경입니다. 2번의 에게-미케네 문명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지요(축적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략으로 분출하는 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예외가 없나 봅니다). 그리고 다음 세기에 도리아 족의 남하로 문명이 파괴됩니다.

일리아스는 대개 B.C. 8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방랑 시인들은 철기 시대에 청동기 시대의 사건들을 읊고, 사람들은 모여 앉아 그 무용담을 듣는 식이지요. 따라서 일리아스에서 아테네 여신이 아테네를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아테네가 트로이 전쟁 당시 어느 정도 세력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일리아스 2권의 그리스의 군세를 열거하는 내용 중에 아테네가 없길래, 다른 왕국들이 트로이 전쟁에 힘을 소진한 사이 서서히 패권을 잡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히려 도리아 족의 남하를 막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이네요. 하긴 트로이 전쟁의 B.C 1200년대와 B.C 5세기의 아테네의 전성기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데서부터 너무 말이 안되는 착각이긴 하지만요.

트로이 전쟁이 트로이의 부를 노린 침략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트로이 전쟁이 오히려 그리스 청동기 왕국들에게 독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앞글의 현이님의 댓글에 썼듯이 신화에 진실이 어느 정도 녹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1. 아트레우스가의 비극

... 트로이를 함락한 이후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프리아모스 왕의 딸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차지가 되었다. 귀향길에서 그가 아르골리스에 이르렀을 때,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과 그의 동료들, 카산드라를 살해했다.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이 전쟁에 나간 사이에 그의 아내를 유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그 살인을 클리템네스트라의 탓으로만 돌렸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아가멤논은 역사상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나 아르카이아의 대군주였던 듯하다. 헬레니즘 시대에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에게 제우스 아가멤논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숭배했다.


2. 오뒤세이아

... 거의 9년 동안 칼립소에 머물던 그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 이타카에 도착했으며 그가 방황하는 오랜 세월 동안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충실한 개와 유모 외에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가 옛날에 쓰던 활을 쏘아보라는 아내의 시험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성공하여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보였다. 그리고는 텔레마코스의 도움을 받아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죽이고, 페넬로페의 남편과 이타카 왕으로서의 지위를 되찾는다.

제가 기억하는 이 두 이야기 외에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신화에 트로이 전쟁의 후유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기스토스는 과연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사랑만을 원했던 것일까요? 특히 오뒤세이아의 아네 페넬로페에게 집적대는 구혼자들의 만행은 '오뒤세이아'를 읽어보면 더 적나라합니다만, 명색이 왕비인 오뒤세이아의 아내를 대하는 태도나 오뒤세이아의 재산을 멋대로 탕진하는 부분들을 읽어보면 한층 더 공감하실 듯 합니다. 과연 구혼자들이 페넬로페라는 미인만을 원했을까요? 아니면 오뒤세이아의 왕위와 부도 함께 원했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은 재미있네요. 자칫하면 지식의 짧음으로 잘못 추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착각했던 사실을 바로잡는 경우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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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재미있게 보았던 영어 교재가 하나 있었습니다. 교재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고 넥서스 출판사였던걸로 기억하는데, 그 교재에는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았었죠. 그 중에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문장 중의 하나가
You are the apple of my eye.
였습니다. 지금 봐도 정말 예쁜 표현인 것 같아요. 뜻은 '넌 너무 아름다워.', 굳이 의역하자면 '넌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정도가 되겠네요. 이 문장과 몇 문장 정도를 자주 읽던 책 속표지에 적어두고 읊고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은 웬지 모르게 이 표현이 생각나더군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 같이 물론 관용적인 표현이겠지만, 왜 하필이면 apple일까? 탐스러운 과일의 대명사여서 그런걸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불펌에 대해 네이버에게 죄송하지만, 뭐 단어 옆에 보니 '내 블로그에 담기'라는 메뉴도 있더군요. 하하...

밑에서 두번째 줄을 읽어보니, apple에 관련된 어떤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the apple of one's eye가 통째로 관용어구였군요. 의미가 '눈동자'라는 것을 보니, 역시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의 영어식 표현으로 봐도 무방하겠네요.

영어 표현 하나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 교재를 보던 시절의 저도 생각나고, 그때 생활이나 사람들도 생각나고. 항상 세상에 낭만이 사라짐을 안타까워하는 저이지만, 정작 제 자신도 어린 시절의 낭만적인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사람 사는게 다 그런가요? 요새 이 표현 참 많이 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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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초학년 때 필수 교양이야 그렇다 치고, 제가 선택했던 선택 교양 과목들은 오지랖 넓은 성품을 반영해서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경영학 개론, 문학 개론, 심리학 개론, 등등... 선택 교양만 봐서는 인문 계열인지, 사회 계열인지, 자연 계열인지 알아챌 수가 없었을 겁니다. 호기심은 어느 정도 충족되긴 했지만, 물론, 학점은 힘들었지요 ㅠ.ㅠ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에서 들었던 또하나의 수업이 바로 현대 천문학 개론이었습니다. 친구와 선배를 꼬셔서 들었지요. 정말 머리 아프게 하는 리포트와 시험 때문에 욕 두고두고 얻어먹었습니다만...

얼마전 뉴스를 보니 태양계 행성이 12개가 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배울 때 명왕성을 행성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지 의심이 간다고 배운 것 같은데, 이렇게 하나, 둘 늘려가면 나중에 몇개가 될 지 고개가 갸우뚱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니 넘어갔습니다. 역시, 결론은 이렇게 났다지요?


명왕성에 관한 기사를 보고 교양 시간에 사용했던 '교양 천문학'이라는 책을 뒤적이게 되네요. 우연히 발견되고 비운의 퇴출을 당하는 묘한 행성입니다. 이름이 그래서 그런걸까요?

명왕성은 태양계에서 9번째 행성으로 태양에서 40천문단위[각주:1]나 멀리 떨어져 있다. 또한 크기가 대단히 작기 때문에 그의 발견은 대단히 어려웠다. 명왕성은 광범위한 사진탐색 끝에 1930년 미국의 천문학자 톰보우(C. Tombough)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는 1930년 2월 18일, 당시 로웰이 예언했던 방향에서 7° 쯤 떨어진 곳에서 명왕성을 발견, 이를 3월 13일에 발표하였다. 이 행성은 그후 희랍신화에서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이름을 따서 플루토(Pluto)라고 명명되었다.

1846년 해왕성이 발견된 후 금세기(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해왕성의 관측은 지속되었다. 그런데, 당시 관측된 해왕성의 궤도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예측된 궤도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다. 그 결과 천문학자들은 미지의 9번째 행성 탐색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명왕성은 질량이 너무 작아서 천왕성이나 해왕성에게 섭동을 주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따라서 명왕성은 발견은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시 관측에서 제시됐던 섭동은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관측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발생된 관측 오차였음이 후에 밝혀졌다.

...

명왕성의 둘레에는 카론(Charon)이 공전하고 있다. 카론은 1978년 6월, 미국 해군천문대의 크리스티(Christy)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사진에 나타난 명왕성의 모습은 원형이 아니라 한쪽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불룩 나온 것이 바로 그는 명왕성의 위성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꾸준히 관측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위성을 카론이라고 명명하였다.

내막은 자세히 모르지만, 미국에서 행성을 12개로 할 것을 제안했던 속내는 명왕성이 12번째 외곽 행성이 될 수도 있었던 제나보다도 덩치가 작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인용했다시피 명왕성은 미국인이 발견했기 때문에 미국 천문학계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행성이죠. 제나를 행성군에 편입시키면서 논란이 되었던 명왕성의 행성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하고 싶었겠지요. 결과적으로는 긁어 부스럼이 된 듯 합니다만...

아무튼 조금 섭섭합니다. 뭐 이 결정으로 태양계 식구가 아닌건 아니고 왜행성으로 격하된 것이지만, 학생들은 이제 행성 이름을 외울 때 '수금지화목토천해'까지만 외우겠군요. 교과서나 문서, 서적 변경은 물론 문제지만, 로마 신화의 플루토(그리스 신화의 하데스)를 떠올릴 때마다 이 사건이 떠오를 듯 합니다. 물론 세일러문의 플루토도 왕따가 되겠군요 ㅠ.ㅠ

명왕성에서 본 태양계 상상도


아.. 별이나 행성들은 너무 예쁘지 않나요? 천문학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Dyno님의 명왕성 안녕...이라는 글에 있는 사진들도 너무 예뻐요. 제 꿈이 한적한 교외에 집 하나 사서 천체 망원경과 사진기를 벗삼는 건데(물론 단순 꿈에 불과할 듯 싶습니다만...). 문득 여전히 별이 하늘 가득 빛나고, 별똥별이 1분에도 몇 개씩 떨어지던 외가가 가고 싶습니다.
  1. 태양-지구거리. 천문단위 또는 Astronomical Unit, 약해서 A.U.라고 한다. 보통 태양계 내의 거리 단위로 사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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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정말 끝없이 오는 것 같다. 정말 하늘에 구멍이 뚫린 건 아닐까. 게다가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번개가 많이 치는 것 같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많았다.

오늘 저녁 벌써 세번 째 번개가 치고, 몇 초 후에 천둥 소리가 나고, 바로 주차장에서 들리는 자동차 도난 경보 장치 소리. 이 자동차 도난 경보음은 왜 나는 걸까?

  1. 번개의 전류 때문이다. 이건 내가 봐도 아닌 것 같고...
  2. 천둥이 공기를 때려 그 진동이 자동차에 전달되는 것이다.
  3. 천둥이 지면을 진동시켜 그 진동이 자동차에 전달되는 것이다.
당장 구글에서 '천둥+경보음'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정답은...



내가 찍은 번호가 맞았다. 설마 다른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닐까? ;;

구글의 다른 검색 결과들을 주욱 훓어보니, 나만 이런 몽상을 하는 건 아닌 듯 하다. 특히 '천둥, 번개 치던 날'이란 글을 보니, 예전에 천둥 소리를 좋아한다던 선배가 생각난다. 여자들은 천둥 소리만 나면 '꺄악~' 소리를 내는 줄만 알았던 내겐 충격이었다. 뭐, 이 글을 쓰신 분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이 세상에서 뭔가 새로운 걸 발명하거나 발견하기엔 너무 늦게 태어난 건 아닐까?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든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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