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초등학생이던 나는 나폴레옹과 한니발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느 교실의 뒤쪽에나 있을 법한 책장에는 문고판 나폴레옹 전기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있었는데, 나는 그 두 권을 읽고 또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두 인물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두 명 모두 알프스를 넘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일까? 하지만, 알프스를 넘은 또 한 명의 위인인 카이사르는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 역시 그러하다. 그가 정치적으로는 천재였지만 군사적으로는 그리 유능한 장수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나중에 자라서 읽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에 그런 사실을 알았을 리는 없고, 사실은 먼저 좋아하게 된 한니발의 적국인 로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적인 내 호불호(好不好)적 현실 감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서 항상 결정적인 순간 한니발을 괴롭히는 로마와, 나폴레옹을 방해하는 영국, 프러시아와 러시아에 분개했다. 저 나라들만 없었으면 저 두 인물이 꿈을 이루었을텐데. 초등학생 시절의 나만의 세계관에선 프랑스, 카르타고 같은 나라들이 우호국이었고 로마(이탈리아), 영국, 프러시아(독일), 러시아같은 나라들은 적국이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수업 시간에라도 그 나라들이 나올라치면, 항상 그 두 인물과 연관시켜 생각하곤 했고, 프랑스나 카르타고는 무조건 좋은 나라인 줄 알았다.

더이상 초등학생은 아닌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 두 인물을 상당히 좋아하는 이유는 서로가 자신들의 생사에 더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전쟁에서 나타내는 압도적인 자신감과 천재성,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항상 200% 이상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외적인 조건들에 막혀 결국은 꿈을 이루지 못하는 두 고독한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 같은 맹목적인 선호는 아니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두 인물을 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 정도는 느끼게 되었고, 그들의 상대방 역시 그들의 존망을 걸고 사력을 다해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프랑스나 카르타고라고 해서 선하기만 한 나라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탈리아, 영국, 독일, 러시아같은 나라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기만 한 나라는 아니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

따라서 나는 두 인물을 좋아하지만, 음악은 '프렌치 팝'이나 '샹송'이 아니라 영국의 'Brit Pop'이나 'Radiohead'의 노래를 좋아하고, 로마의 흥망성쇠를 다룬 '로마인 이야기'를 읽곤 한다. 러시아에서 어떻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며, 요즈음 독일 월드컵을 보면서 독일의 예상 밖 놀라운 실력에 혀를 내두른다.

며칠 전 있었던 대한민국:스위스전을 보고 난 후의 일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그분들의 세계관과 현실 감각에 조금 안타까움을 느낀다.
"스위스는 이제부터 가상 적국이다."
"너네는 중립국이 아니라 왕따였구나. 그러니까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시계나 뚝딱 만들고 있지."
"정의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크라이나의 완승입니다!... 원흉인 스위스, 이제 응징을 받는건가요?"

스위스 축구팀이 블래터 회장에게 판정을 유리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는지, 심판에게 돈을 건넸는지는 검증된 바 없다. 블래터 회장이 판정을 유리하게 하도록 지시했는지, 아니면 회장에 대한 심판들의 과잉 충성이었는지 역시(심증은 많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니, 설령 그러했다 하더라도 스위스 축구팀과 블래터 회장이 악하면 스위스 전 국민이 악인인가?
우크라이나가 완승을 해서, 이제 더이상 정의가 왜곡되는 일은 없어질 것인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왜 정치, 경제, 축구 어느 분야에서나 욕을 해댈 마녀가 필요한 건가?

축구 경기는 축구 경기일 뿐이다. 스위스에게 져서 그것도 판정 논란으로 져서 화가 나지만, 한국전에서의 스위스팀은 그들에게 굴러온 예상치 못한 떡을 꿀꺽했을 뿐이다. 크로아티아의 한 선수가 한 경기에 두 번 경고를 받고서도 시치미 떼고 뛰다가 세번 째에서야 퇴장한 것처럼. 축구에서의 스위스팀과 시계를 잘 만드는 중립국으로서의 스위스는 같은 미움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일본 축구가 매번 한국 축구에 깨진다고 해서 일본 정치가들이 "잘못했습니다. 독도 망언 이제 안할께요."라고 결코 말할리 없는 것처럼. 스위스팀이 미워 우크라이나 팀을 응원할 수 있지만, 스위스가 가상 적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니발을 좋아한다고 해서 로마를 나의 적국으로 여기는 초등학생이 아닌 것처럼.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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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나만의 지식 KIN이라도 개괄 정도는 정리해줘야 하나? ;; 링크로 패스;;


아마도 셈족(??? 다소 의문이 생기는...)인 페니키아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의 혼혈이었던 대부분의 카르타고 인들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 일부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가 과연 흑인 장군 - 정확히 말하면 검은 피부의 - 이었을지를 조사해보려 했으나, 자료 부족과 귀차니즘으로 다음으로 미룸 -0-;;

페니키아인들이 바알신을 숭배했으므로,

한니발(Hannibal)이라는 이름은 '바알의 축복을 받는 자'
바르카(Barca)는 '번갯불' 또는 '바알신이 내리는 번개'라는 의미.

로마를 침략한 것 때문에 전쟁광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상당히 냉정하고 균형잡힌 심성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하들에게 솔선수범하고, 잘 돌보았기 때문에 여러인종의 용병들임에도 로마군의 포위로 인한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투항 또는 탈영한 적이 없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승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보다 더 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경이로운 초승달-포위 전술때문에?

한니발이 결국 로마를 멸망시키지 못한 이유에 대한 많은 의견들이 존재한다.
  1. 한니발은 고대 최고의 전술가였을지는 몰라도, 전략가는 아니었다.
  2. 칸나에 전투 이후의 한니발의 행동이 너무 소극적이었다.
  3.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없었다(혹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므로, 부족했다).
  4. 한니발의 부하 중에 유능한 장수가 없었다.
  5. 그외 생각나거나 보는대로 첨가.
한니발이 별 수를 썼어도 이기지 못했을 게 뻔하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로마를 좋아해서는 절대 아님), 그래도 저 네 가지 중에 딱 하나를 꼽자면 4번을 꼽고 싶다. 1~3번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들은 한니발의 잘못이나 실수라기 보다는 로마가 매우 잘 대처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라는 참상을 일으키는 당사자를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개개인의 생사에 더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전쟁만큼 인간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한니발은 고금을 통틀어 유니크한 천재이지 싶다. 하지만, 그에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문과 천재적인 전술, 그 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로마인들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르듯, 그 전쟁은 일개인과 당시 가장 강력하게 부상하던 군사 국가와의 전쟁이었다.

전투에서는 항상 이기지만, 전쟁의 향방은 어쩌지 못하는 외로운 천재에 대한 동정심, 자신의 능력은 200% 이상 발휘하면서도, 항상 외적인 조건들에 막혀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한니발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요인들이 아닐까 싶다. 나부터도 '하다못해 두 동생들이라도 한니발의 반 정도만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니까.

우리는 그런 그에게 우리 자신들의 좌절감과 비애를 투영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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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나의 점수 : ★★★★★

역사는 과정에 있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면,
전쟁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입니다.
전쟁만큼 당사국 국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Bellum Hannibalicum 한니발 전쟁]

독자 여러분께

p.9

역사는 과정에 있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면, 전쟁만큼 좋은 소재도 없을 것입니다. 전쟁만큼 당사국 국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에서는 뛰어난 그리스인인데,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데다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명장까지 갖고 있던 카르타고인인데, 왜 로마인에게 패했을까.

프롤로그

제1장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

p.24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0년 뒤에 과거의 적을 자기네 지도자로 선출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로마인의 이같은 성향은 포에니 전쟁을 치르는 로마에 커다란 이점을 가져다주게 된다.

p.35

항해술에 자신이 없는 로마인은 이 '까마귀'를 이용하여 해상 전투를 육상 전투로 바꾸려고 생각한 것이다...'까마귀' 같은 신무기를 생각해낸 것은 로마에 해운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p.43

과두정치는 선거를 거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의회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지도층을 구성하는 이들에게는 국정 제일선에서 활약할 기회를 가능한 한 평등하게 부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과두정치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단점 가운데 하나는 총사령관을 겸임하는 집정관이 임기중에 전과를 올리려고 애쓰기가 쉽다는 점이다...이것은 로마 집정관을 속전속결형으로 만들기 쉬워서, 포에니 전쟁 같은 장기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결함이 되었다.

p.44

지중해 세계에서 최강의 해군국으로 꼽히던 카르타고도 경쟁상대인 그리스가 쇠퇴한 뒤로는 적다운 적을 만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실전 경험을 쌓지 못한 군대는 약체화를 피할 수 없다. 기원전 3세기의 카르타고는 해운국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 해군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p.47

적에게 포로로 붙잡혔던 사람이나 사고 책임자에게 다시 지휘를 맡기는 것은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려는 온정이 아니다. 한 번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그 실수에서 틀림없이 교훈을 얻었으리라는 게 그 이유니까 재미있다.

p.56

하밀카르는 움직임이 봉쇄당하는 것을 꺼렸다. 주도권은 자신이 잡지 않으면 안된다.

p.61

마키아벨리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점이지만, 공화정 로마에서는 군사령관을 겸임하는 집정관에게 일단 임무를 주어 내보낸 뒤에는 원로원조차도 작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패전 책임을 묻지 않는 것도 걱정없이 임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p.63

로마는 상대가 받아들이기 쉬운 쪽으로 강화를 맺었다.


제2장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기원전 241년~기원전 219년

p.67

전쟁이 끝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는 결정된다. 승패는 이미 판가름났으니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거기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p.68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긴 쪽보다 진 쪽이 더 많은 압박에 시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p.75

로마인의 남다른 점은 뭐든지 자기들이 다 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자기네가 제일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p.90

투표권으로 나타나는 권리의 확산은 병역으로 나타나는 의무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로마 군단을 구성하는 시민병도 더욱 광범위한 시민권 보유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군단 지휘관에게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더불어, 로마라는 국가의 거국일치 체제를 강화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p.92

로마인은 체계화를 좋아했지만, 융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p.97

무장으로서 최고사령관의 능력은 백인대장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 명장들은 모두 백인대장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들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제3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전기 기원전 219년~기원전 216년

p.119

한니발이 동시대인에 비해 단연 뛰어난 점은 정보의 중요성에 착안한 점이었다.

p.134

'로마 연합'을 정치 건축의 걸작이라고 평한 토인비의 주장...로마는 이 패배자들을 피지배민족이라는 소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소키'라는 적극적인 존재로 대우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도를 비롯한 로마의 '사회간접자본'설비에서도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승리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지만, 한니발과 대결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로마가 가진 진정한 힘이 되었다.

p.135

한니발이 치른 전투를 추적해 보면, 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술을 철저히 공부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보병과 기병의 비율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p.136

전투 결과를 좌우하는 전술은 콜럼버스의 달걀인 동시에 콜럼버스의 달걀이 아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콜럼버스의 달걀이지만, 그 방식을 답습해도 누구나 반드시 같은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콜럼버스의 달걀이 아니다. 그 방식을 살리느냐의 여부는 그 방식을 실제로 구사하는 인간의 재능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알렉산드로스니까 성공했지, 누가 해도 성공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의 선례를 참고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독자성으로 그 방식을 살렸다.

티치노-제1회전

트레비아-제2회전

p.145

이 시대의 평민 출신 집정관 중에는 강경한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명예심이나 출세욕에 사로잡혀 그러는 것은 아니다. 호민관이 평민의 대표자였던 시대보다, 평민 출신이 귀족을 포함한 로마 시민 전체의 대표인 집정관에 선출된 시대에는 자기가 평민계급의 대표자라는 것을 더 강렬하게 의식한다. 자기 출신계급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기 뒤를 이을 평민계급 출신 집정관을 위해서라도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p.148

포위전법은 적의 주력 부대를 무력화시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전술의 기본이기도 했다.


트라시메노-제3회전

p.154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각오는 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식까지 지배계급의 무능에 희생되는 것을 감수할 마음은 나지 않기 때문이다.

p.171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아무리 방해를 받아도 해내고야 마는 것을 "한니발은 무엇이든 통과한다"는 한 마디로 바꾸어 말하게 되었다.


칸나에-제4회전

p.173

서구의 사관학교라면 반드시 가르친다는 역사상 유명한 칸나에 전투

p.178

31세의 장군은 로마군 사령관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들은 적장의 책략에 빠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전쟁터로 끌어내려면 그 경계심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마치 로마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p.186

로마라는 나라가 수도에만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형태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로마라는 나라는 면과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

p.190

자신이 목적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선례는 없을까 하고, 선인들의 업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있는 법이다. 한니발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p.192

마케도니아의 젊은 장군(알렉산드로스)은 기병이 갖는 기동력을 구사하여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사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군 전체를 유기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적의 주력부대를 무력화시키려 한 것이다.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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