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술버릇

L. Log/잡담 2006. 12. 6. 21:58
영화 '달콤한 인생'의 영어 제목은 'A Bittersweet Life'다. 굳이 직역하자면 '달콤-쌉싸름한 인생' 정도? 이 영화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달콤한 인생'이란 한국어 제목은 반어적이고 극적이지만, 영어 제목은 더 적나라한 반면 우리의 인생을 닮아있다. 술중에 달콤-쌉싸름한 인생을 닮은 술은 단연 소주가 아닐까? 쓴 맛 투성이인 것 같지만, 어떤 날은 정말 단 맛이 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단 맛이 날때가 언제나 기분 좋은 때는 아니다. 아직 20대인 내가 느끼기에도 소주란 녀석은 정말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

술이 무서운 달이 돌아왔다. 하긴 불황이다, 뭐다 해서 주위에서도 이런 말이 무색해지기도 하고 나 역시 술을 마시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술을 좋아한다는 말도 점점 옛말이 되어가긴 하지만, 역시 12월에 상대적으로 술자리가 많은 건 틀림없지 않을까.

술은 처음 배울 때가 중요하다는 말은 절대로 옳은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아버지나 어른들이 주시는 술 한두잔 정도 밖에 마시지 못했던 내가 대학교에 입학해서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 이 소주란 녀석은 너무나 썼다. 결국 나는 소주를 혀에도 닿지 않도록 목구멍으로 털어넣는 방법으로 이 녀석을 상대했다. 선배들이 말했다.
"얘 소주 잘 마시네?"
하지만, 내 독특한 술버릇 덕에 내 속은 더 망가졌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주의 단맛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술을 털어넣는 버릇이란 좀처럼 버리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냈었다.

소주의 도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하더라. 여느때처럼 술잔을 목구멍에 털어넣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낯선 느낌이 들었다. 친구에게 물었다.
"너도 술을 목구멍에 털어넣냐?"
친구는 갑자기 희한한 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이다. 그날은 내내 소주를 입안에 머금고 혀로 굴려보다가 삼켰다. 쓴맛은 더했지만, 뒤끝은 더 편한 것도 같다.

지금까지 나는 가급적이면 삶의 쓰디씀을 외면하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견딜 수 밖에 없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억지로 목구멍에 털어넣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고통과 쓰디씀과 대면해서 맞서 견뎌보는 것도 필요하고 질게 뻔한 게임에 기꺼이 몸을 던져보는 것도 자신을 위해 좋았을 텐데, 그런 면에서 난 아직 철이 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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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정판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 세계사)

1917년(1세)
12월 30일에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2), 모친 김용(金龍, 1891~1948)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본관 파평. 아명은 해환(海煥).당시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은 부유한 농부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보다 석 달 전인 9월 28일에는 고종사촌인 송몽규(宋夢奎, 1917~1945)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태어났다(아명은 韓範, 부친 宋昌義, 모친 尹信永). 윤동주와 송몽규는 둘 다 기독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윤동주의 호적을 비롯한 각종 공식 기록에 그의 출생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1923년(7세)
9월, 부친 윤영석은 관동 대지진 당시 동경에 유학중이었다.

1924년(8세)
12월, 누이 혜원(惠媛, 아명 貴女) 태어나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 및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이 있었다.

1927년(11세)
12월, 동생 일주(一柱, 아명 달환) 태어나다.

1928년(12세)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을 정기구독 시작. 송몽규는 『어린이』를 정기구독. 그들이 다 읽은 후 동리아이들이 빌려서 읽음. 명동에 공산주의 만연.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다.

1929년(13세)
4월,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형태에서 <인민학교>로 넘어갔다가 9월에는 중국 행정당국에 의해 공립으로 강제수용되다. 외삼촌 김약연 평양 장로교 신학교 입학.

1930년(14세)
김약연 1년 수학 후 목사가 되어 명동 교회 부임. 명동에 공산테러 성행.

1931년(15세)
3월 20일, 명동 소학교 졸업. 송몽규, 김정우 외 1명과 함께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대랍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이 해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

1932년(16세)
4월, 용정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하다.
부친 인쇄소 차렸으나 사업이 부진하다.

1933년(17세)
4월, 동생 광주(光柱) 태어나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인 시 3편을 제작 기일 명기하여 보관 시작
시 「초한대」(12. 24),「삶과 죽음」(12. 24)「내일은 없다」(12. 24)

1935년(19세)
1월 1일,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꽁트 부문에 「술가락」이 아명 <宋韓範>이란 이름으로 당선.
4월, 송몽규, 학업 중단하고 중국 낙양 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러 중국으로 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윤동주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 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으로 들어가다.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 간행의 학우지 『숭실활천』 제 15호에 시 「공상」 게재, 최초로 작품 활자화되다.
시 「거리에서」(1. 18), 「空想」(『 崇實活泉』 10월), 「蒼空」(10. 20), 「南쪽 하늘」(10)
동시 「조개껍질」(12)

1936년(20세)
3월,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퇴.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문익환은 5학년에 편입.
4월,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송몽규가 제남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 압송되어 고초를 겪다.
9월 14일에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된 후 계속 요시찰인으로 감시당하다.
동시 「고향집」(1. 6), 「병아리」(1. 6)(『카톨릭 소년』 11월호 발표), 「오줌싸개지도」(『카톨릭 소년』 1937년 1월호 발표), 「기왓장내외」
시 「비둘기」(2. 10), 「離別」(3. 20), 「食券」(3. 20) 「牧丹峰에서」(3. 24), 「黃昏」(3. 25), 「가슴 1」(3. 25), 「종달새」(3), 「山上」(5), 「午後의 球場」(5), 「이런 날」(6. 10), 「양지쪽」(6. 26), 「山林」(6. 26), 「닭」(봄), 「가슴 2」(7. 24), 「꿈은 깨어지고」(7. 27), 「谷間」(여름), 「빨래」.
동시 「빗자루」「햇비」「비행기」
시 「가을밤」(10. 23)
동시 「굴뚝」(가을), 「무얼 먹고 사나」(10)(『카톨릭소년』 1937년 3월호 발표), 「봄」(10), 「참새」(12), 「개」, 「편지」, 「버선본」(12월초), 「눈」(12),「사과」, 「눈」, 「닭」
시 「아침」
동시 「겨울」(겨울), 「호주머니」(1936년 12월호, 또는 1937년 1월호 발표)
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1월호), 「빗자루」(12월호)를 발표할 때 <尹童柱>란 필명 사용.

1937년(21세)
4월, 졸업반인 5학년으로 진급.
송몽규는 대성중학교(4년제) 4학년으로 편입하여 학업 재개.
8월, 백석 시집 『사슴』을 배껴 필사본을 만들어 가지다. 이 무렵 광명중학교 농구선수로 활약.
9월,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 등지로 수학여행.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과 심하게 대립, 결국 조부의 개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연전 문과>에 진학하기로 결정되다.
시 「黃昏이 바다가 되어」(1)
동시 「거짓부리」(『카톨릭 소년』 10월호 발표), 「둘 다」, 「반딧불」
시 「밤」(3)
동시 「할아버지」(3. 10), 「만돌이」, 「나무」
시  「장」(봄), 「달밤」(4. 15), 「風景」(5. 29), 「寒暖計」(7.1), 「그女子」(7. 26), 「소낙비」(8. 9), 「悲哀」(8. 18), 「瞑想」(8. 20), 「바다」(9), 「山峽의午後」(9), 「毘盧峰」(9), 「窓」(10), 「遺言」(10. 24)(『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 23일자 발표)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4월 9일, 서울 연전 문과 입학. 대성중학교 4학년을 졸업한 송몽규도 함께 입학하다. 연전 기숙사 3층 지붕 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인이 한방을 쓰면서 연전생활 시작
시 「새로운 길」(5. 10)(학우회지『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비오는 밤」(6. 11), 「사랑의 殿堂」(6. 19), 「異蹟」(6. 19), 「아우의 印象畵」(9. 15)(『조선일보』 학생란 발표. 1939년 추정), 「코스모스」(9. 20), 「슬픈 族屬」(9), 「고추밭」(10. 26)
동시 「햇빛 · 바람」「해바라기 얼굴」「애기의 새벽」「귀뚜라미와 나와」「산울림」(5)(『소년』 1939년 발표).
산문 「달을 쏘다」(10)(『조선일보』 학생란 1939년 1월호 발표)

1939년(23세)
연전 문과 2학년으로 진급.
기숙사를 나와서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 북아현동에서 살 때,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을 방문,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월), 시 「유언」(2. 16), 「아우의 인상화」(날짜 미상)를 윤동주(尹東柱) 및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 동시 「산울림」을 『少年』(날짜 미상)에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 『문장』『인문평론』을 매달 사서 읽다.
시 「달같이」(9), 「薇 병들어」(9), 「투르게네프의 언덕」(9), 「산골물」, 「自畵象」(9)(학우회지 『文友』 1941년 6월호 발표), 「少年」

1940년(24세)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다. 고향 후배인 장덕순 연전 문과 입학. 같이 입학한 하동 출신 정병욱(1922~1982)과 깊이 사귀다.
1939년 9월 이후 주욱 절필하다가 이해 12월에 가서 3편의 시를 쓰다.
시 「八福」(12월 추정), 「慰勞」(12. 3), 「病院」(12)

1941년(25세)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생활 시작.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집 옮기다.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전 4년을 졸업하다.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다.
시 「무서운 時間」(2. 7), 「눈오는 地圖」(3. 12), 「太初의 아침」「또 太初의 아침」(5. 31), 「새벽이 올 때까지」(5), 「十字架」(5. 31), 「눈 감고 가다」(5. 31), 「못 자는 잠」「돌아와 보는 밤」(6), 「看板없는 거리」「바람이 불어」(6. 2), 「또다른 故鄕」(9), 「길」(9. 30), 「별헤는 밤」(11. 5), 「序詩」(11. 20), 「肝」(11. 29)
산문 「終始」

1942년(26세)
연전 졸업 후 일본에 갈 때까지 한달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부친 일본 유학 권하다. 키에르케고르를 탐독. 졸업증명서, 도항증명서 등 도일수속을 위해 1월 19일에 연전에 <平沼東柱>라고 창씨한 이름을 계출하다. 1월 24일에 쓴 시 「懺悔錄」이 고국에서 마지막 작품이 되다.
3월에 일본에 건너가서 4월 2일에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송몽규는 <宋村夢奎>라고 창씨한 이름으로 도일하여 4월 1일에 경도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입학.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했다가 동북제국대학 편입을 목표로 급히 도일. 그러나 동북제대로 가지 않고 10월 1일에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 무전 아파트에서 하숙생활.
시 「懺悔錄」(1. 24), 「흰 그림자」(4. 14), 「흐르는 거리」(5. 12), 「사랑스런 追憶」(5. 13), 「쉽게 씌어진 詩」(6. 3), 「봄」<연대미상작품>
산문 「별똥 떨어진 데」「花園에 꽃이 핀다」

1943년(27세)
1월, 경도에 와서 맞은 첫 겨울방학에서 귀성하지 않고 경도에 남다.
7월 10일, 송몽규 특고경찰에 의해 경도 하압경찰서에 독립운동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윤동주, 고희욱도 검거되다.
소식을 듣고 동경에서 면회간 당숙 윤영춘이 윤동주가 <고오로기>란 형사와 대좌하여 그가 쓴 우리말 작품과 글들을 일역(日譯)하고 있는 것을 목격. 외사촌 김정우도 면회.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검찰국에 송국되다.

1944년(28세)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2 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2년(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일, 출감예정일 1945년 11월 30일).
4월 13일, 경도지방재판소 제 1 형사부는 송몽규에서 <징역2년>을 선고(확정: 1944년 4월 17일, 출감예정일: 1946년 4월 12일).
이들은 판결 확정 뒤에 복강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 시작.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1945(29세)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복강형무소 안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
2월 18일, 북간도의 고향집에 사망통지 전보 도착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가져오려고 도일, 복강 형무소에 도착하여 먼저 송몽규를 면회해서,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동주가 그래서 죽었다는 증언을 듣다.
3월 6일,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
3월 7일, 복강형무소에서 송몽규 눈을 뜬 채 운명. 부친 송창희와 육촌동생 송희규가 도일하여 유해를 가져다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
봄이 되자 송몽규 가에서 <靑年文士宋夢奎之墓>란 비석을 해서 세웠고, 잇달아 윤동주 가에서도 <詩人尹東柱之墓>란 비석을 세운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조국이 해방되다.

1947년
2월 13일, 해방 후에 처음으로 유작 「쉽게 씌어진 詩」가 당시 주간이던 시인 정지용의 소개문을 붙여 『경향신문』 지상에 발표되다.
2월 16일, 서울 <플라워 회관>에서 첫 추도회 거행되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여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
5월, 5 · 10 제헌국회의원 선거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거

1955년
2월, 서거 10주년 기념으로 유고를 더 보충한 증보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정음사에서 출간되다. 이 증보판 시집부터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제외되었다. 그들이 납북인사 내지 좌익인사라는 혐의를 받는 걸 꺼린 것이다. 냉전시대의 비극적 상황의 한 단면이었다.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조도전대학의 대촌익부(大村益夫) 교수에 의해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와 비석의 존재가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되다.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4월 5일에 북간도의 유지들이 명동 장재촌에 있던 송몽규의 묘를 용정 윤동주 묘소 근처로 이장하다.

1995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송몽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애국장>은 <독립장>보다 한 등급 아래 훈장이다.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판을 거듭하면서 계속 증보되었다.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다. 현재 윤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의 출간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들은 3백 편을 상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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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기에 남아있지만, 블로그상에서 삭제되었으므로 링크를 밝히지 못하는 글.

집을 고치는 사람의 목적은 그 집을 지키려는 것일까, 부수려는 것일까? 고치려다 더 부수고 마는 능력의 문제는 별개로.
보수, 수구적이던 나라에서의 개혁이란 결국은 보수를 지키겠다는 것일까, 진보를 지키겠다는 것일까? 개혁하려다 애꿎은 서민들 다 잡는 능력의 문제는 별개로.

애초에 뻔했던 것을, 자신들이 속아 놓고 누가 누굴 욕하지? 이라크 파병도, FTA도 당연한 수순임을.
어떤 부분에선 안타까운 마음은 든다. 단지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 시간에 배우던 열성인자, 우성인자를 떠올리게 하는 그 정당의 무능함도 질릴 정도로 엄청나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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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egy is the creation of a unique and valuable position, involving a different set of activities.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입니다. 거의 모든 기업이 생산성 프론티어 근처에 와 있는 현재,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트레이드오프를 통해서만 유니크한 위치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오래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 목표로 하는 고객층을 좁혀야 합니다. 어디를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회사인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어떤 회사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게 전략입니다. 이건 너무도 힘든 결정입니다. 누구나 모든 것을 다 잘 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베끼려면 모든 것을 통째로 베껴야 하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전략적 포지셔닝을 할 때 주의할 점
  1. 트레이드오프를 하지 않는 것의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
    -주로 사용되는 논리는 '경쟁회사가 이것을 채택하기 전에 먼저 하세요'
  2. '성장'의 유혹
    -성장이 한계에 도달했다면, 어떻게 현재의 전략적 위치를 더욱 심화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1. '누구나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싶어한다.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 아직도 이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도 마찬가지.
  2. 수확체증의 법칙과 연결 고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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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된 기사인데, 노트북에 묵혀두고 조사가 늦어서. ㅠ.ㅠ


디자이너 사회에는 'MAYA(Most Advanced, Yet Acceptable)론'이라는 게 있다.
"앞서 가되 구성원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20세기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레이먼드 로위의 명언이다.

개혁을 염두에 둘 때 언제나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논리가 아닐까.

  1. 방학 일주일 전에 방학 시간표를 짜놓고 아직 방학이 아니니 방학때까지 놀겠다는 학생보다, 시간표 없어도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더 낫다는 점.
  2. 게다가 현 정부는 전략의 부재 이전에 전략을 짜낼 씽크탱크가 없어 보인다는 점도.
  3. 그래도 이 MAYA론을 조중동이 지적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 한경이니까 그나마 수긍하면서 넘어가지, 조중동에서 저 MAYA론을 들고 나왔더라면 세기와 국경을 넘나든 코메디가 될 뻔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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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님이 이 글을 보실 것을 알기에 좋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점 뿐만 아니라 세부점에서도 정말 공감하는 글입니다.

자녀가 정말 좋은 글을 쓰게 하고 싶으면 어린 시절부터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세뇌시킬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들어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녀의 호기심에 대한 적절하면서 균형잡힌 대답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식 수준이지요.

하지만 저것은 지극히 원론적인 주장이고, 과연 어릴 때부터 '짜라투스트라'를 읽는다고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어질까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한국에서처럼 그렇게 무식하게 연습시킨다고 한국의 모짜르트가 나올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바보스런 부모 아래서는 천재도 바보가 되기 십상입니다. 정말 천재라면 부모가 그렇게 시키지 않아도 이미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고, 천재가 아니라면 지레 질려서 오히려 부모가 강요하는 그 분야에 거부감을 느낄 확률이 높습니다.

어린 자녀에게 책을 즐겨 읽는 습관을 들게 하고 싶으시면, 저희 부모님처럼 그저 디즈니 명작 동화 한 질을 던져 주시기 바랍니다. 감히 말하건데 저는 저 디즈니 명작 동화 한질이 적어도 대학까지의 인생을 좌우했습니다. 저 동화집이 계기가 되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동화에서도 인간의 편견이 스며들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엄하신 아버지 밑에서도 자유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되었고,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 시험에서 외국어 영역의 상당한 지문은 읽어볼 필요도 없이 답을 고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특히 고등학교 영어 문제, 상당한 지문을 저 디즈니 명작 동화의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 싶은 이야기에서 지문을 따왔더군요).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제 앞으로의 인생 역시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책을 읽는 습관을 통해 제가 선호하지 않는 분야의 책이나 글도 진득하니 읽어보아야 하는 이유를 배웠거든요.

좌뇌/우뇌 문제 역시 뭐든지 지나치게 쪼개서 바라보려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직접적인 논거는 아니지만, 관련된 최근의 한가지 사건을 들어보렵니다. 얼마전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들을 훑어보신 분들은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분께서 위기의 원인 중 한가지로 '극도의 분과주의'를 꼽으셨는데 저는 거기에 공감합니다. 오늘날 그렇게 과를 쪼개대서 그 분야의 천재나 전문가가 더 많이 나오고 있나요? 전문적으로 그렇게 잘 나눠서 가르치셔서 지식은 많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이 양산되고 있나요? 기술이 중요한 줄만 알고 정작 사람은 뒷전인 사람들은요? 학자라면서 자신만의 것을 탐구하거나 세상을 좀더 좋게 바꿔보려는 생각은 안하고 케케묵은 책과 사상들만 파고 있는 사람들은요? 인터넷을 통해 세상의 뉴스를 거의 실시간으로 습득하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부르는 명칭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은요?

인간이라 함은 며칠 전의 글에서 썼듯이 머리는 차가우면서 가슴은 따뜻해야 버젓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좋은 가치란 어느 한쪽만 만족시킨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글을 머리로만 쓴다고 가슴으로만 쓴다고 좋은 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이님의 말씀처럼 명문은 이성을 납득시키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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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다른 글을 쓰려고 했는데, 현이님의 남녀 사이에 친구가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글을 보고 오늘은 이 문제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현이님의 블로그에 댓글로 달았듯이, 저는 제 개인적인 경험들로 인해 "남녀간에는 우정이 존재하기 힘들다(존재할 수 없다가 절대 아닙니다)"라고 생각하는 터이지만, 현이님의 글이 대부분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습니다. 이런 것은 남에게 설득하고 강요한다고 납득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이 글 역시 다른 이를 설득하거나 현이님의 글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닌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을 끼적였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 우선 '친구'나 '우정'이라는 단어가 사람마다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이전에 친구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썼듯이 심지어 한 사람의 일생에서도 친구의 범주가 바뀔 수 있는데 사람마다는 얼마나 차이가 많이 나겠습니까? 예를 들면 사람을 넓게 사귈 것이냐, 좁게 사귈 것이냐 하는. 거기에 남녀라는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사이의 카테고리를 끼워 넣어야 하다니, 얼마나 복잡 미묘해질까요?

2. 현이님의 비유 중에 흑인과 백인 친구,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현이님도 그리 엄선한 예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의 우정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현이님 죄송해요 ㅠ.ㅠ). 우선 스승과 아버지, 제자와 아들의 우정은 스승과 아버지가 제자와 아들을 친구처럼 대해줘야 가능해지는 관계가 아닐까 싶네요. 게다가 스승과 아버지는 제자와 아들이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제자와 아들을 어느정도 이해하려고만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제자와 아들은 천재나 성인이 아닌 한 그러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에서 어느정도 일방적인 관계이지요.

남자와 여자가 처음에 '우리 친구로 지내자.'라고 할 때 처음부터 어느 한 쪽이 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말로 그런 감정이 없을 수도 있지요. 문제는 남녀간의 사이는 단순한 흑인과 백인의 사이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저는 애초에 만들어진 게 남자는 여자에게, 혹은 여자는 남자에게 결국엔 성적으로 끌리게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게 종족 유지를 위해 자손을 낳기 위한 본능이든, 뭐든 말입니다. 여기서 이성에 관한 보수성, 진보성이라는 문제가 또 하나 개입하죠.

3. 점점 바뀌고는 있지만, 한국 특유의 정서와 사회적 특수성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남녀 사이에 친구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쪽이었죠. 그래서 제가 따르는 어르신들이나, 형/ 누나들에게 많이도 여쭤보고 물어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대.체.로. 나이가 많으실 수록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제 블로그를 자주 들르시는 분들이라면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을 아실 것이기 때문에 일반화해서 이것 봐라, 하고 싶은 생각은 물론 없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장 큰 요인은 결혼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다른 이성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에 대한 한국 사회 특유의 거부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단지 나이를 먹을 수록 보수적이 되기 때문일까요? 세상이 점점 변해가는데도요?

4. 저는 "남녀 사이에 진실한 우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상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몇 번의 쓰디쓴 경험을 통해 너무 일찍 그 환상에서 깨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이성과의 진실한 우정이 있어본 경험과 그런 우정이 있다고 믿었던 확신이 깨져버린 경험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환상을 품고 사느냐 깨져버리고 현실을 깨닫느냐라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5.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무슨 여성 혐오증에 걸린 사람처럼 제가 사랑할 사람 외에는 거리감과 경계감을 드러내면서 여자들을 대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제가 이따금 모여서 만나고, 식사도 하고, 술도 한 잔 하는 여자들은 뭐라고 부를 거냐고 한다면 '친구'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다른 사람에게는 잘 못하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공유할 수 있는 - 그 녀석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는 언제나 '내 웬수'라고 표현하는, 실은 '친구'보다 '벗'이라는 표현을 더 붙여주고 싶은 - 친구들은 아닙니다. 여자가 그런 '벗'이라는 범주에 끼는 경우는 앞으로 제 평생에 제 아내가 될 사람, 한 사람밖에 없을 겁니다.

요약하면 남녀 사이의 우정 문제는 우정이라는 범주의 문제, 이성에 관한 보수성/ 진보성의 차이, 성적 본능에 관한 인식의 차이, 경험 혹은 환상의 문제라는 여러가지 요인들 때문에 섵불리 강요하거나 결정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문제에서의 제 나름의 경험들과 가치관들 때문에 힘들다고 보는 거구요.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나중에 제가 틀렸다는 걸 깨닫고 생각이 바뀔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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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구글 개인화 홈페이지에 괜찮은 콘텐츠 추가할 것이 없을까 둘러보다가 오늘의 나사 이미지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미지들이 마음에 안들더군요. 그냥 행성이나 별 같은 자연만이 들어간 이미지를 원했는데, 꼭 인공적인 것이 들어가더라고요. 예를 들면 우주 상공의 왕복선 안에서 내려다 본 허리케인의 이미지인데 우주 왕복선의 윈도우가 한켠에 끼어드는 식의. 그래서 링크 사이트를 딸각거리다가 허블 공식 사이트 http://hubblesite.org/ 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F11키를 누르신 후, 이미지 좌측 상단의 이미지 확장 버튼을 누르시면 크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A Giant Hubble Mosaic of the Crab Nebula]



[Heart of the Whirlpool Galaxy (M51)]
This image of the center of the Whirlpool Galaxy shows visible light from starlight, and light from the emission of hydrogen. Bright star clusters, highlighted in red, shed light emitted by hydrogen atoms. Intricate "dust spurs" branch out around the main spiral arms.



[Iridescent Glory of the Helix Nebula]
This detailed picture of the Helix Nebula shows a fine web of filaments, like the spokes of a bicycle, embedded in the colorful red and blue gas ring around this dying star. The Helix Nebula is one of the nearest planetary nebulae to Earth, only 650 light years away.




[Rainbow Image of the Egg Nebula]
An onionskin-like structure of concentric dust shells surround a central, aging star. Twin beams of light radiate from the star and illuminate the usually invisible dust. Artificial colors show how light reflects off the particles and heads toward Earth.




[Double Clusters of Stars (NGC 1850)]
This "double cluster," NGC 1850, is located in the Large Magellanic Cloud. It consists of a large cluster of stars, located near a smaller cluster (below and to the right). The large cluster is 50 million years old; the other only 4 million years old. The cluster is surrounded by gas believed to be created by the explosion of massive stars.



생각 같아서는 이 블로그에 모조리 퍼담고 싶었지만, 티스토리에게 죄송한....^^; 제 생각에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이미지 다섯 장만 골랐습니다. 월페이퍼 용이라네요. 밤하늘을 봐도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모를 빛들이 드문드문 눈에 띠는 서울 하늘을 볼 때마다 씁쓸할 때가 많았는데, 가끔 이 포스트에 들러 천체 망원경의 꿈을 대신해야겠습니다. 아, 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우주를 보면 한낱 먼지같은 저인데요. 모든 사물 앞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 정말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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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 일리아스를 읽고 있습니다를 쓰면서 제가 착각했던 부분이 있네요. 그 당시의 그리스가 흔히 말하는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 시대처럼 도시국가들일 거라고 지레짐작 해버렸으니 ^^;

고대 그리스 / 위키 백과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 에게-미노아 문명
소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
B.C. 3000 청동기 돌입
B.C. 2000 선형 A 문자 사용, 미노아 문명의 전성기

2. 에게-미케네 문명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의 선조들이 주도한 문명
B.C. 2000년경부터 남하하여 그리스 본토에 자리잡고 원주민과 혼합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의 반도에 많은 소왕국을 건설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왕국 중 '황금의 미케네'로 일컬어질 정도로 맹주격(이 미케네 및 아르고스, 코린트의 왕이 아가멤논)
미케네는 미노아 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후 미케네가 에게 해의 패자가 된다.

3. 도리아 족의 남하
B.C. 12세기 그리스인의 마지막 이주자인 도리아족에 의하여 미케네 문명 몰락
미케네 사회 붕괴 후 그리스 본토에는 3개 내지 4개부족으로 구성된 소왕국 형성.
도리아족의 남하에 따른 혼란과 타국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 그 시기는 호메로스 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외도 많다.


여기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시기가, B.C. 기원전 1240~30년, 일설에는 기원전 1260경입니다. 2번의 에게-미케네 문명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지요(축적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략으로 분출하는 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예외가 없나 봅니다). 그리고 다음 세기에 도리아 족의 남하로 문명이 파괴됩니다.

일리아스는 대개 B.C. 8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방랑 시인들은 철기 시대에 청동기 시대의 사건들을 읊고, 사람들은 모여 앉아 그 무용담을 듣는 식이지요. 따라서 일리아스에서 아테네 여신이 아테네를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아테네가 트로이 전쟁 당시 어느 정도 세력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일리아스 2권의 그리스의 군세를 열거하는 내용 중에 아테네가 없길래, 다른 왕국들이 트로이 전쟁에 힘을 소진한 사이 서서히 패권을 잡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히려 도리아 족의 남하를 막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이네요. 하긴 트로이 전쟁의 B.C 1200년대와 B.C 5세기의 아테네의 전성기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데서부터 너무 말이 안되는 착각이긴 하지만요.

트로이 전쟁이 트로이의 부를 노린 침략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트로이 전쟁이 오히려 그리스 청동기 왕국들에게 독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앞글의 현이님의 댓글에 썼듯이 신화에 진실이 어느 정도 녹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1. 아트레우스가의 비극

... 트로이를 함락한 이후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프리아모스 왕의 딸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차지가 되었다. 귀향길에서 그가 아르골리스에 이르렀을 때,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과 그의 동료들, 카산드라를 살해했다.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이 전쟁에 나간 사이에 그의 아내를 유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그 살인을 클리템네스트라의 탓으로만 돌렸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아가멤논은 역사상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나 아르카이아의 대군주였던 듯하다. 헬레니즘 시대에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에게 제우스 아가멤논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숭배했다.


2. 오뒤세이아

... 거의 9년 동안 칼립소에 머물던 그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 이타카에 도착했으며 그가 방황하는 오랜 세월 동안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충실한 개와 유모 외에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가 옛날에 쓰던 활을 쏘아보라는 아내의 시험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성공하여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보였다. 그리고는 텔레마코스의 도움을 받아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죽이고, 페넬로페의 남편과 이타카 왕으로서의 지위를 되찾는다.

제가 기억하는 이 두 이야기 외에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신화에 트로이 전쟁의 후유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기스토스는 과연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사랑만을 원했던 것일까요? 특히 오뒤세이아의 아네 페넬로페에게 집적대는 구혼자들의 만행은 '오뒤세이아'를 읽어보면 더 적나라합니다만, 명색이 왕비인 오뒤세이아의 아내를 대하는 태도나 오뒤세이아의 재산을 멋대로 탕진하는 부분들을 읽어보면 한층 더 공감하실 듯 합니다. 과연 구혼자들이 페넬로페라는 미인만을 원했을까요? 아니면 오뒤세이아의 왕위와 부도 함께 원했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은 재미있네요. 자칫하면 지식의 짧음으로 잘못 추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착각했던 사실을 바로잡는 경우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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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람에게는 각자 세 번의 커다란 기회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세 번의 기회라니 사람마다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순히 잘생긴 혹은 예쁜 이성이 말을 걸어온다거나 보수가 조금 더 좋은 직장에서 제의가 온다거나 하는 사건 따위는 자잘한 편이겠죠. 개인적으로 로또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어 받을 만한 큰 돈은 필요없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뭔가 엄청난 사건이기는 하니 그 정도면 기회 중의 하나가 될런가요?

인생의 세 번의 기회라는 걸 저는 야구 9회말 타석에 빗대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경우를 생각해보니, 저는 첫 번째 기회였던 한 사람을 놓치고 그 사람이 떠나면서 주고 간 두번 째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9회말 노주자 투아웃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20대 후반의 나이인데 너무 비관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또 복권은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으니 투수의 연습구나 투 스트라이크 이후의 파울볼 정도로 취급하고 있구요.

그런데요. 저 말이 '참 말도 안되는 소리다, 기회는 오는 게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저 말을 지어낸 이가 상당히 지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야구는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아웃인지 심판이 판정해 주지만 자신의 인생은 심판을 봐주는 다른 이가 없죠. 자기 자신이 심판인 겁니다. 아주 비관적인 사람이야 무슨 소리를 해도 비관적일테니 패스하도록 하고, 만약 제가 아주 낙관적이었다면 9회말 원아웃 정도일 겁니다. 아무리 낙관적이래도 그 한 사람은 제 인생에서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제가 조금 비관적으로 생각해서 투아웃이라고 생각하는 건데요. 만약 앞으로 '이게 바로 세번 째 기회다!'라고 생각하는 기회를 놓친다면 저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 그건 세번의 기회에 속하지 않나보다.'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게 저는 계속 제 꿈을 이루기 위한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겁니다. 물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꾸준히 자신을 계발해야겠지만요.

2006년 8월 4일에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2집 [Scoring Position]이 나왔다는 소식을 아주~ 뒤늦게 알고서 문득 이런 저런 잡생각들이 떠올라 적어 보았습니다. 요새 음악 쪽에 관심을 많이 못가지네요 ㅠ.ㅠ 이 인디밴드에 대해 혹시 모르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홈페이지인 http://www.rockwillneverdie.com/3rd/home.htm 에 가시면 폭소를 터뜨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곡 제목들부터가 아주 웃깁니다만, 곡들 자체는 그리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자신이 1회초 첫타석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시든, 9회말 투아웃의 마지막 타석 풀카운트라고 생각하시든 인생의 멋진 만루홈런을 하나씩 날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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