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개로 하늘을 날지만, 소년은 천사를 쫓으려는 꿈으로 하늘을 난다. - 빠리소년
어휴.. 쓰고 나니 너무 기네요. 늘푸른님을 비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적극적인 의견 개진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이 너무 길어 포스트 한뒤, 트랙백 겁니다. 어제 마지막 댓글에서 결론이 안 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오늘 포스팅한 발신자 번호표시 관련글은, (제가 쓴 댓글의 마지막이라던 약속도 있고 해서) 그냥 제 생각을 블로그에 적은 것이라는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제가 동의하는 편인 여름하늘님의 글에도,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늘푸른님의 글에도 일부러 트랙백을 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왕 장문의 댓글을 다셨으니 하나 하나 적어 내려가겠습니다. 제가 무조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 의견이 그렇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씁니다.

첫째 부분, 우선 CID건의 문제는 제가 부가서비스라는 점, 소비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한계로 인정하고 넘어갔습니다. 한마디로, 이 두가지를 단순 비교하기에는 맹점이 있다는 것을 제가 미리 인정하고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것도 볼드체로. 그래서 처음 서두에서도 '좋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제가 이 사례를 참고하면서 하고 싶었던 요지는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비소비자지만, 이런 사례도 있었으니 소비자들은 참고해 보시겠느냐는 의미였지, '이거봐 상황이 똑같잖아~' 라는 의도로 쓴게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 부분, 이 문제는 늘푸른님이 경영학 전공이신 듯 하니 맞겠지요. 이로써 이 CID 사례의 맹점이 하나 더 드러났습니다. 그점 인정합니다. 좀더 좋은 사례를 찾아봐도 좋을 듯 하네요.

BMW라는 차의 문제 역시, 맞습니다. BMW 사고 굴릴 돈 없으면 현대차 사면 되죠. 하지만, BMW를 구경해보고 견적을 훑어보고, 시승해본 사람들은 '와~ 돈있으면 저차 사고 싶다'고 생각하죠. 스타벅스의 가격 문제는 비소비자라고 해서 수중에 5000원이 없기 때문에 비싸다고 덜덜 떠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찌질한 공격 댓글들 말고 적어도 블로그에서 가격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은 다들 마셔봤는데, BMW 만큼의 동경심이나 만족감은 안느껴지더라는 거죠. 바로 거기서 드시는 분들에 대한 공격이 아닌, 가격에 대한 공격이 나오는 겁니다. BMW 사보셨습니까?  저도 못 사봤습니다. 또, 호텔 커피숍에 가서 만원짜리 커피 드셔보셨습니까. 저도 안 마셔봤습니다. 사서 타보고, 마셔봤어야, 그 가격이 문제인지 제기를 하죠. 마셔봤자, 소수나 마실 일을 뭐하러 머리 아프게 블로그에 쓰겠습니까?

빈폴같은 의류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제 예를 드신 그 친구에게 여쭤보시죠. 만약 '빈폴이 비싸더라, 안사'라는 이슈가 생겨나서 가격을 내려야 한다는 말들이 생기면 환영할 건지, 반대할 건지, 혹은 의견을 낼 의도가 있는지. 음반 문제는 제가 잘 아는 입장이라 제가 먼저 꺼내려고 했는데 적어 주셨네요. 말미에 적도록 하죠.

2580의 보도가 황색언론의 전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황색언론이 황색언론의 효과를 발휘하는 건 거기에 놀아나는 적어도 일부의 인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일부때문에 가격 문제가 기호 문제와 자꾸 섞이는 것이 안타깝다는 겁니다. 제 앞글 후반부의 요점은 그것입니다.

저는 CD를 즐겨삽니다. 학생 때 돈 없어서 테이프 산  것을 후회할 정도로 CD에 애착이 많습니다. 만약, 누가 '그 비싼 거 뭐하러 사? 차라리 밥을 두 끼 먹겠다.'라고 비꼰다면, 저도 울컥 할겁니다. 하지만, CD를 잘 안사는 블로거가 'CD 너무 비싼 것 같아서 안사요. CD가격을 내리도록 CD 많이 사시는 분들이 노력해보시면 어때요?'라고 포스팅 한다면 감사하다고 적는 건 오버센스라도, '옳소! 맞습니다! 한번 해볼까요?'라는 댓글이 달릴 겁니다. 제가 원래는 가격이 적정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말이죠. 어차피 살건데 많은 이들이 참여해서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면 좋은 일 아닙니까? 음반 제작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이야, 테이프에 비해 CD가 왜 두배나 비싼지 별 논리를 들면서 반대하겠죠. 그런데, (제가 어제, 오늘 내내 골치아파 이마를 짚어가며 고민한 것은) 왜 '스타벅스의 가격 문제에서는' 어제 제 포스트의 댓글과 같은 반응들이 나오냐는 겁니다. 왜 한 명도 아닌 소비자 집단(솔직히 집단 전체인지도 문제시 됩니다만)이 스타벅스 가격을 옹호할까요? 내리자는 의견에 동참해도 당연할 판에...

이 차이만 생각해봐도, 스타벅스 문제가 그저 그런 단순한 자본주의의 기호품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꾸 반복하게 하시는데, 적어도 저는 고가의 커피라는 문화가 생소해서 소비하는 이들의 행태가 한심해서 가격 문제를 들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CD를 즐겨 사는 저 자신도 한심해지는 거죠. 하지만, 스타벅스의 가격을 자꾸 옹호하는 태도에는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계시진 않은가'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솔직히 경영학 전공하신 입장에서 그럼 스타벅스는 찔리는 것 없습니까? 왜, 옹호하는 자본주의 논리만 펴시는지요? 또한 비소비자라 상관 없어 보일지라도, 앞서 댓글에 썼듯이 이것들이 옳은 주장이든, 그른 주장이든

  1. 미국 자본주의의 벤치마킹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것.
  2. 비합리적인 소비 심리의 전형.
  3. 전반적인 물가 상승 기여 문제.
  4. 외국 기업이라는 애국심의 문제.
  5. 외국 기업들의 한국 소비자들을 봉으로 여기는 가격 담합 문제.
등등 전문가이든 비전문가이든 참견하고 싶게 만들고, 나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들고, 추리 또는 토론 가능한 많은 코드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앞선 론스타나 카르푸건 같은 영향도 있겠지요.

외제차 가격 문제가 제가 어릴 때 이슈가 됬었습니다. 소수만이 타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갔죠.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 가격 문제 제기되었습니다. 이것도 넘어갔죠. 명품 외제 선호 현상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냥 넘어갔죠. 지금까지 스타벅스만 걸고 넘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CID건처럼 스타벅스 문제가 이슈화 되어서 가격 인하 얻어낼 수는 없을까요? 스타벅스가 다른 문제들의 선례가 될 수는 없을까요? 제가 안타까운 점은 이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스타벅스 가격를 옹호하는 의견은 아무리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아직 많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커피 문화라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커피 문화의 옹호와 가격의 옹호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건데, 제가 20대 남성이라서 여성들을 이해못하는 것이 아니라, 2,30대 남성이 그런 주장을 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 주위의 의견을 들어보니, 모든 남성들이 저에게 동의하지는 않는 것처럼, 모든 여성들이 늘푸른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이점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서로 주장만 주고받을 뿐인 것 같습니다. 스타벅스 문제는 정말로 이 글로 마칠까 합니다. 정 쓰더라도 비밀글로 써놓고 저 혼자 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고 장마 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어제의 댓글 말미에서 그만 혼자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좋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찾아보았다.



이통통신 3사 "인하 어렵고, 무료도 안 된다"

시민단체의 CID 요금인하 요구에 대해 이동통신 3사는 이동통신 기본료와 음성통화 요금이 해마다 인하되고 있는 상황에서 품목에 따라 최근 2∼3년 간 수백 억 원을 투자한 부가서비스 요금까지 내릴 경우 경쟁력이 크게 약화된다며 적극 반발하고 있다.

특히 KTF와 LGT는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요금 무료는 물론 인하도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 비쳤다.
.
(중략)
.
반면 시장지배적 사업자인 SK텔레콤은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SK텔레콤의 한 관계자는 "당정협의를 통해 정통부가 요금 인하 방침을 밝히고 있고, 우리쪽에도 요금인하 검토를 요구해와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입장이 나온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SK텔레콤측도 CID요금 인하나 무료화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
(중략)
.
이 관계자는 "시민단체에서 외국의 사례를 들면서 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서 "외국에서 CID요금을 무료화할지 몰라도 우리가 무료화하고 있는 부가서비스를 유료화하는 등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SK텔레콤은 현재 47종의 부가서비스 가운데 약 20종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NTT 도코모의 경우 국내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유료로 서비스하는 것이 상당수라는 설명이다.




"원가는 한달에 100원인데 2500원이 넘는 돈을 받는 건 가입자를 등쳐먹는 행위"(참여연대 논평)
2005년 10월 20일 / SKT, 내년부터 발신자표시 무료화 / issue-i

SKT가 18일 내년 1월부터 발신자번호표시(CID) 서비스를 무료화 한다고 발표했다. 그 동안 CID 무료화 및 SMS 요금 인하를 주장해 온 소비자 단체들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한 덕분으로 보인다.

요점은 발신자 번호 표시 무료 혹은 인하는 불가능하다 -> 무료화 해라 -> 무료화 하겠다
물론 부가 서비스에 불과한 것이고, 소비자로부터 시작된 경우라는 차이는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두가 '어? 이거 왜 2~3000원 다 받아?' 했던가? 어떤 이가 '이거 왜 이렇게 비싸?'라고 문제를 제기했고, 다른이들이 '어? 생각해보니 그러네?', 이렇게 차츰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결국 무료화된 것이다.

앞서, 내가 생각하는 스타벅스 문제의 논점이라는 글에서 지적했듯이, 초점은 수요자들의 소비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스타벅스의 가격이 되어야 한다. 뉴스와 신문의 문제 제기로 가격 문제가 이슈가 될 수 있었음에도,
  1. 우선 개념 없는 이들의 스타벅스를 마시는 이들(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욕하기,
  2. 당연히 화가 날 만한 소비자들의 '남의 기호에 간섭하지 말아라',
  3. '그럼 소비자들은 가격에 만족하는 것인가?'
  4. '그래 만족한다. 비소비자는 간섭하지 말아라.'

이렇게 차츰 감정적이고 초점이 흐려져간다고 생각한다(물론. 어제의 글에 이어진 댓글들에서 늘푸른님과 Nera님이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다. 네번째 문제에서 가격 문제 자체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의견을 밝히셨으므로). 아니라고? 지금 올블로그에서 스타벅스를 쳐서 최근 글들을 살펴보시라. 비소비자 모두가 마시는 이들을 표적으로 비난한 게 아닌데 왜 남이 마시는 걸 간섭하느냐는 글들이 주로 나오고 있다.

내가 아쉬운 건, 비록 비소비자들이 주로 시작한 건 사실일 수 있지만 '발신자 표시 무료화'건처럼 소비자들 또한 문제를 인식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진전될 수도 있었던 토론이 처음 개념없는 이들의 인신 공격으로 인해 점점 탁해지더니, 결국 비소비자가 제시하는 글들은 싸그리 '반미주의자들의 글'이나 '2580이나 한 번 보고 시류에 영합해서 한마디씩 던지는 간섭'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곁에서 대충 보는 이들은 그러게 왜 남한테 간섭해~ 라고 말하고.

내가 아는 스타벅스를 즐겨찾는 이는 '좋아서 마시기는 하는데, 좀 비싸'단다. 우리는 가격에 별 불만 없다며, 원천적으로 가능성을 차단하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럼 가격에 불만 있었지만 할 수 없이 마시던 소비자들은? 아무튼 처음 시작한 개념없는 인신 공격 악플들이 문제는 문제다.

'지금껏 그런 경우가 없다', '비소비자가 뭐라 해봤자 소모적인 논쟁만 될거다'라는 말들은 수긍하기가 힘들다. '다모'의 명대사가 아니더라도, 길이 처음부터 길이던가? 여러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다져지니 길이 된거지. 왜 스타벅스만 뭐라 하냐고? TV에서도 터졌겠다, 외국 기업에서 스타벅스 문제가 선례가 되어주면 안되는 걸까? 마시는 당사자들도 이익인데.

ps. 중국의 스타벅스 가격 문제도 그렇다. 北京故事님의 글에 따르면 대략 이 정도인 듯 하다(스타벅스 가격이 논란이 되고 있군요). 어제 댓글에서는 또다른 곁가지로 확대되어 논점이 흐려질까봐 말았지만, 중국 역시 北京故事님의 말씀을 빌어도 체감상 비싸게 느낄 것 같다는 의견이다. 스타벅스의 가격 문제는 아마도 아시아가 문제인 것 같은데. 그럼 중국 가격 문제는 중국 소비자들이 주장할 문제 아닐까. 물가 대비 가격이 1등만 아니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는 건 아니지 않은가. 비판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우리 뒤에는 중국이 있으니까 중국보다만 싸면 돼'라는 전제로 비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솔직히 나도 괜히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토론을 즐기지도 않고 토론을 잘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몇몇 악플러들 때문에 발단부터 흐려지는 걸 보면서 더욱.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글쎄... 난 20대 남성이고 스타벅스 커피 마셔보니 맛있던데, 하하. 하지만, 비싸서 누가 사줄 때만 먹는다. 물론 난 담배는 피지 않고. 오히려 난 스타벅스 커피를 사서 마시는 것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별 생각 없었지만, 담배에 관해서는 악감정이 많은 남자 중의 하나다.

스타벅스 문제는 스타벅스를 마시는 이를 욕한다기보다 스타벅스가 비싸다는 것이 문제 아닌가? 물론 마시는 이들을 욕하는 포털의 댓글들은 무시하고. 그럼 단순히 비싸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한국에서 유난히 비싸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고가 정책 문제를 가지고 삼성 핸드폰이나 BMW, 가전 제품들과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제품들이 한국에서 유독 비싼 것인가? 삼성 핸드폰이 한국에서만 고가 정책을 쓰고 외국에서는 저가 공습을 펼칠까? 유독 스타벅스만 가지고 물고 늘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패밀리 레스토랑 역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패밀리 레스토랑 역시 한국이 유독 비싸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타벅스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20,30대 남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주 고객층이 여자들이다 보니, 어제 2580이나 신문을 통해 스타벅스 문제를 접한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향해 욕을 하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같은 남자로서 사실 부끄럽다. 하지만, 남녀 문제로써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 역시 반대다. 그럼 고가의 삼성 핸드폰이나 외제 자동차, 가전 제품은 남성들만 선호하는가? 그럼 여성들의 비싼 향수에 외제 상표 옷은? 이렇게 성별로 접근하는 건 난타전으로 갈 뿐인 듯 하다. 나 역시 항상 문제를 접근할 때 다짐하는 바이지만 성급한 일반화는 곤란하다. 앞서 밝혔다시피 나처럼 스타벅스를 마시는 여자들에 그리 반감을 가지지 않는 남자들도 있고, 스타벅스에 단순한 반감을 가진 여자들도 있으며 스타벅스의 가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다.

요점은, 스타벅스가 유난히 한국에서만 비싸다는 것이 논쟁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링크한 두번째 글의 여름하늘님께서 적으신 것처럼 우리는 스타벅스 경영진이 아니라, 고객이다. 스타벅스의 고가정책이 왜 성공하는가는 스타벅스 경영진과 경쟁 기업, 그리고 경영을 전공하는 이들이 연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 사이에 왜 유독 스타벅스가 한국에서만 비싼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결국 가격이 내려갈 수 있다면, 마시는 이들도 좋은 것 아닌가? 초점이 흐려지고 점점 감정적이 되거나 논점이 왜곡되어 결국 다른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 묻혀지는 것보다는 말이다.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비가 정말 끝없이 오는 것 같다. 정말 하늘에 구멍이 뚫린 건 아닐까. 게다가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번개가 많이 치는 것 같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많았다.

오늘 저녁 벌써 세번 째 번개가 치고, 몇 초 후에 천둥 소리가 나고, 바로 주차장에서 들리는 자동차 도난 경보 장치 소리. 이 자동차 도난 경보음은 왜 나는 걸까?

  1. 번개의 전류 때문이다. 이건 내가 봐도 아닌 것 같고...
  2. 천둥이 공기를 때려 그 진동이 자동차에 전달되는 것이다.
  3. 천둥이 지면을 진동시켜 그 진동이 자동차에 전달되는 것이다.
당장 구글에서 '천둥+경보음'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정답은...



내가 찍은 번호가 맞았다. 설마 다른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닐까? ;;

구글의 다른 검색 결과들을 주욱 훓어보니, 나만 이런 몽상을 하는 건 아닌 듯 하다. 특히 '천둥, 번개 치던 날'이란 글을 보니, 예전에 천둥 소리를 좋아한다던 선배가 생각난다. 여자들은 천둥 소리만 나면 '꺄악~' 소리를 내는 줄만 알았던 내겐 충격이었다. 뭐, 이 글을 쓰신 분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이 세상에서 뭔가 새로운 걸 발명하거나 발견하기엔 너무 늦게 태어난 건 아닐까?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든다. ㅠ.ㅠ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요새는 신문을 보는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거의 안보고 살지만 좀 어린 시절, 거의 몇 달 동안 여러 신문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동시에 볼 기회가 있었다.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일이었지만, 원한다면 매일매일 똑같은 기사를 십수 종류의 신문을 통해 읽을 수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알아보자 하는 마음에 여러 신문들을 훑었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안좋게 말하는 이들의 의견만 보고 들은지라 조선일보에 단순한 거부감 정도만 있었다. 말하자면 나도 단지 맹목적으로 조선일보가 싫었던 철부지 안티 중 하나였다. 그러던 나에게 몇달의 신문 읽기 중에 아직도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는 건, 조선일보와 한겨레 신문의 각지의 1면 톱기사를 비교해봐도 거의 단어하나 틀리지 않는 분명 똑같은 사건들이 사설면에만 가면 서로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각 신문의 기사들만 읽어보고, 미숙하지만 나름대로 내 생각을 정리한 다음 조선일보와 한겨레 신문의 사설을 읽었다. 대체적으로 내 생각은 조선일보보다는 한겨레 신문 쪽에 가까웠다. 그런 일을 한동안 하다가, 결국 나는 조선일보는 읽는 것을 관두었다. '신문을 통해 세상을 좀더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내 철없는 목표는 실패로 끝났다. '신문은 사람들을 세뇌하기 딱 좋은 도구이다.'라는 결론만 얻게 되었다.

어제 정말 멋진 분의 글을 읽게 되었다. '조선일보 헤까닥 술이 덜 깬겨?'라는 글인데,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자체가 맘에 들거나 비판 내용에 탄복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태도와 자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렇구나. 무엇인가를 비판하려면 이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조선일보를 싫어하고 비판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조선일보에 관심(?)이 있는 분의 블로그를 본 것은 이번이 두번 째이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블로그도 많겠지만, 내가 본 한에서.

라디오에서 순진[각주:1]과 순수[각주:2]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리컵이 있는데, 유리컵이 텅 비어 있다면 순진한 것이고, 유리컵 안에 아주 맑고 깨끗한 물이 가득차 있다면 순수한 것이라고. 어떤 대상을 비판하는 것도 이 순진과 순수의 원리와 같지 않을까. 대상을 혐오하고 접근 자체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비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무엇 혹은 누군가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혹은 그사람)을 비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태도는 비판이 아니라 비난, 혹은 단순히 개인적인 혐오일 뿐이다. 그런 비난과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려 해서는 안되며, 다른 이들이 결코 설득당하지도 않는다.

우연히 본 글에서 좋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 마음이 꾸밈이 없이 순박하고 참됨. [본문으로]
  2. 잡것의 섞임이 없는 것.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것. [본문으로]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가난은 죄다'라는 골빈해커님의 글을 뒤늦게 읽게 되었다. 글 내용도 짧고 그냥 개인적인 단상 형식으로 쓰신 듯 해서 그냥 읽고 지나칠까 했지만, '단언컨데'라는 단어가 조금 맘에 걸려 글을 써본다.

맞다. 노력도 하지 않고 결과를 바라는 경우 '가난은 죄다'라는 말이 맞다. 하지만, 이런 경우들은 어떨까.

  1. A라는 남자는 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수술비를 대면서 두 명의 어린 동생을 양육해야 한다. 게다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자살하면서 유산으로 남긴 10년 동안 갚아도 모자랄 만큼의 빚을 갚아나가야 한다.
  2. B라는 남자는 철없던 시절 단 한번의 치명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 정신을 차린 그는 겜방 알바라도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전과가 있는 그를 아무도 써주려 하지 않는다.
  3. C라는 여자는 겜방 알바를 하던 중, 전부터 추근대던 겜방 알바 사장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 그녀는 다시 일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지만,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남자들만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직장을 유지할 수가 없다.
  4. D라는 남자는 두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다. 10년 전엔 '이정도 돈이면 집을 사서 우리 가족 행복할 수 있겠지.'라며 열심히 일했건만, 10년이 지난 지금 집값은 배나 뛰어 장만할 수나 있을지 고민이다. 그런 그가 만난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아버지가 부자였던 친구 녀석은 아버지의 돈을 잘 굴려 미국에도 별장을 몇 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위의 경우들은 물론 꾸며낸 상황이긴 하지만, 있을 법도 한 경우들이다. 주위에 그런 사람들을 본다면 '가난은 죄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매력은 왠만큼 노력하면 누구나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위의 약자(소위, 가난한 자들 뿐 아니라)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보장 제도를 강화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 하는 이유는, 구조적인 문제나 사회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 모두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약자가 가난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비록 결과적으로 빈곤층에 속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네번 째 경우처럼, 출발선이 다른 데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은 어떨까.

자본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아무리 '적자 생존'의 진화론이라 해도 인간의 세계는 약자는 모두 도태되는 동물의 세계가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약자에게 친절한 시스템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가난은 죄가 아닐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새벽에 8강 1경기에 이어 2경기 이탈리아:우크라이나전을 볼까 하다가 이탈리아가 초반에 한 골 넣는 것을 보고 오늘도 어김없이 선취골 넣은 이탈리아가 빗장 수비 할 것 같고, 너무 졸리기도 해서 자버렸는데 후회스러웠다(3:0의 스코어라니... 재미있었을 듯).

아무튼 요점은 그게 아니고 경기 시작 전 이탈리아의 국가가 한글 자막으로 나오는데, '스키피오의 투구'라는 단어가 눈에 띠었다. 왜 '카이사르의 투구'라고 하지 않고? 스키피오보다는 카이사르가 더 유명할 것 같은데.

  1. 단순히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2. 이탈리아 내에서는 카이사르보다 스키피오를 더 높이 평가한다.
  3. 카이사르의 전술, 리더쉽, 정치관, 국가관 등에 많은 영향을 준 스키피오를 넣는 것이 더 낫다.
  4. 그냥 작사한 사람 맘이거나 아무 생각 없이 스키피오를 선택했다.

이중에 어느 것일까. 아니면 이 네가지 외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060702일 17:27 추가]

이탈리아 국가에 대해 조사하다가 가능성 있는 점을 알아냈다.

제목 : 이탈리아의 형제들이여 (Fratelli d'Italia)
작사 : 마멜리 Goffredo Mameli (1827-1849)
작곡 : 노바로 Michele Novaro (1822-1885)
배경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 시기. 작사자의 이름을 따서 마멜리 찬가(Inno di Mameli)라고도 한다.

이탈리아의 통일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동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정복 전쟁의 성격보다는 민족 자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이 자극한 민족주의와, 이대로 분열되어 있다가는 걸핏하면 침략당하는 약소 민족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이탈리아 통일 전쟁의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보다는 스키피오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스키피오는 로마에 있어 구국의 영웅이고, 카이사르는 정복 전쟁을 통해서 제국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그럴듯 하긴 한데, 이탈리아 근대사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없을까. 내 추리가 틀렸다면 상당히 민망할텐데...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초등학생이던 나는 나폴레옹과 한니발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느 교실의 뒤쪽에나 있을 법한 책장에는 문고판 나폴레옹 전기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있었는데, 나는 그 두 권을 읽고 또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두 인물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두 명 모두 알프스를 넘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일까? 하지만, 알프스를 넘은 또 한 명의 위인인 카이사르는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 역시 그러하다. 그가 정치적으로는 천재였지만 군사적으로는 그리 유능한 장수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나중에 자라서 읽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에 그런 사실을 알았을 리는 없고, 사실은 먼저 좋아하게 된 한니발의 적국인 로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적인 내 호불호(好不好)적 현실 감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서 항상 결정적인 순간 한니발을 괴롭히는 로마와, 나폴레옹을 방해하는 영국, 프러시아와 러시아에 분개했다. 저 나라들만 없었으면 저 두 인물이 꿈을 이루었을텐데. 초등학생 시절의 나만의 세계관에선 프랑스, 카르타고 같은 나라들이 우호국이었고 로마(이탈리아), 영국, 프러시아(독일), 러시아같은 나라들은 적국이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수업 시간에라도 그 나라들이 나올라치면, 항상 그 두 인물과 연관시켜 생각하곤 했고, 프랑스나 카르타고는 무조건 좋은 나라인 줄 알았다.

더이상 초등학생은 아닌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 두 인물을 상당히 좋아하는 이유는 서로가 자신들의 생사에 더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전쟁에서 나타내는 압도적인 자신감과 천재성,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항상 200% 이상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외적인 조건들에 막혀 결국은 꿈을 이루지 못하는 두 고독한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 같은 맹목적인 선호는 아니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두 인물을 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 정도는 느끼게 되었고, 그들의 상대방 역시 그들의 존망을 걸고 사력을 다해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프랑스나 카르타고라고 해서 선하기만 한 나라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탈리아, 영국, 독일, 러시아같은 나라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기만 한 나라는 아니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

따라서 나는 두 인물을 좋아하지만, 음악은 '프렌치 팝'이나 '샹송'이 아니라 영국의 'Brit Pop'이나 'Radiohead'의 노래를 좋아하고, 로마의 흥망성쇠를 다룬 '로마인 이야기'를 읽곤 한다. 러시아에서 어떻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며, 요즈음 독일 월드컵을 보면서 독일의 예상 밖 놀라운 실력에 혀를 내두른다.

며칠 전 있었던 대한민국:스위스전을 보고 난 후의 일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그분들의 세계관과 현실 감각에 조금 안타까움을 느낀다.
"스위스는 이제부터 가상 적국이다."
"너네는 중립국이 아니라 왕따였구나. 그러니까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시계나 뚝딱 만들고 있지."
"정의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크라이나의 완승입니다!... 원흉인 스위스, 이제 응징을 받는건가요?"

스위스 축구팀이 블래터 회장에게 판정을 유리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는지, 심판에게 돈을 건넸는지는 검증된 바 없다. 블래터 회장이 판정을 유리하게 하도록 지시했는지, 아니면 회장에 대한 심판들의 과잉 충성이었는지 역시(심증은 많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니, 설령 그러했다 하더라도 스위스 축구팀과 블래터 회장이 악하면 스위스 전 국민이 악인인가?
우크라이나가 완승을 해서, 이제 더이상 정의가 왜곡되는 일은 없어질 것인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왜 정치, 경제, 축구 어느 분야에서나 욕을 해댈 마녀가 필요한 건가?

축구 경기는 축구 경기일 뿐이다. 스위스에게 져서 그것도 판정 논란으로 져서 화가 나지만, 한국전에서의 스위스팀은 그들에게 굴러온 예상치 못한 떡을 꿀꺽했을 뿐이다. 크로아티아의 한 선수가 한 경기에 두 번 경고를 받고서도 시치미 떼고 뛰다가 세번 째에서야 퇴장한 것처럼. 축구에서의 스위스팀과 시계를 잘 만드는 중립국으로서의 스위스는 같은 미움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일본 축구가 매번 한국 축구에 깨진다고 해서 일본 정치가들이 "잘못했습니다. 독도 망언 이제 안할께요."라고 결코 말할리 없는 것처럼. 스위스팀이 미워 우크라이나 팀을 응원할 수 있지만, 스위스가 가상 적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니발을 좋아한다고 해서 로마를 나의 적국으로 여기는 초등학생이 아닌 것처럼.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어제 오후에 외출을 하면서 비가 한차례 올 거라는 일기 예보를 보았기 때문에 우산을 들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주룩주룩 오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를 본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느긋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바로 앞에서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뛰어가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하는 것도 아닌 걸 보고선 같은 방향이니 함께 쓰고 가자고 할까 하다가 그냥 비가 오는 풍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세상이 하도 험악하다 보니 괜히 작업이니, 혹은 불순한 의도니 하는 의심이 서린 눈초리를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사 오기 전 우리 집은 초등학교 때 우리 선생님 댁과 가까웠다. 그래서 졸업하고도 몇 번 뵐 수가 있었는데, 그 선생님께 어린 따님이 있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산을 가지고 있었고, 우산을 쓰고 길을 가던 중, 그 선생님의 딸을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나는 그 아이를 쫓아가서
"우산 같이 쓰고 갈래?"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혹시나 해서 내가
"너희 집 이쪽 맞지?"
라고 물었더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었다. 귀여운 녀석^^ 걸어가면서 좀 친해지려고,
"이름이 뭐니?"
하고 물었더니, 그 꼬마 왈
"엄마가 그런거 모르는 사람한테 가르쳐 주지 말랬는데요?"
역시 선생님 딸다웠다. 참 똑똑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은 씁쓸했다.

앞서 걷는 그 여자를 보면서 갑자기 그 수년 전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워낙 비 맞는 걸 싫어해서 왠만하면 가벼운 3단 우산 하나쯤은 들고 다니는 나는 갑자기 오는 비에 당황하는 남자를 보면 노소를 막론하고 같이 쓰고 가는 편이다. 하지만, 여자라면 아주머니나 할머니라면 함께 쓰고 가자고 권하지만, 꼬마 아이나 젊은 처자면 모른 체 한다. 어쩌면 개인적인 성차별, 나이차별인지도 모르겠다. 또다른 의미의 소심함일 수도 있고...

나는 여전히 적어도 세상의 절반 이상의 남성들은 성폭력이나 원조 교제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와도, 단호히 거절할 만큼의 선량함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폭력이나 아동 성폭력의 상당수가 지인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주위의 남자들을 믿어달라는 변명이나 호소 역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성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히 여성과 그 가족일 것이고, 2차적인 피해자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 지 몰라 공포심을 갖는 모든 여성들이겠지만, 단지 대부분의 가해자들과 같은 성(性)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절반 이상의 선량한 남자들 역시 간접적인 피해자가 아닐까 싶다.

비가 더더욱 세차게 내리자 앞서 걷던 여학생은 이제서야 뛰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중년이 되면, 우산을 함께 쓰고 가자고 권하는 여성들의 연령 커트라인은 한참 더 위로 올라갈 것이다.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진다는 데, 왜 사람에 대한 공포심은 더해만 가느냐고 세상만 탓하면서, 그런 핑계를 대면서 어쩔 수 없다는 양, 남들을 도울 기회를 하나씩 하나씩 외면해 나갈 것이다.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
올블이나 다른 블로그에서 '나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라고 공공연히 밝히는 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투표를 할 때 특정 후보를 찍어야만 하는가?



저 글이 사실이라면 실수로 기권표가 나왔는지, 현 정치에 대한 불만이나 출마한 모든 후보에 대한 불신임의 의도에서 기권표가 나왔는지 궁금해진다.

이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이러한 연상을 하게 된 재미있는 블로그를 우연히 읽었다.



지난 2002년 유시민의 '사표론'을 들면서 "낙선한 후보에게 간 표는 사표겠지만, 그 사표는 그냥 죽어버린 표가 아니라, 나름의 의미를 가진 유권자들의 목소리다."라는 문장에 참 공감이 간다.

하나의 정답이 있는 시험문제가 아닌 이상, 나는 어느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사 역시 투표를 통해 밝힐 수 있지 않을까? 귀찮거나 정치에 무관심해서 무응답의 의미로 투표 참여를 안했는지, 특정한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기권표를 던졌는지 정확한 의사표현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조금 귀찮더라도 말이다. 그래야 기권표가 단순한 사표가 아닌 의미있는 표가 될 테니까. 아예 '모두 지지안함'이라는 선택란이 있어서, 그 쪽이 1위를 하면 모든 당이 후보를 다시 공천하게 해버렸으면 좋겠다. 한 80%정도가 거기에 찍으면, 정치가들이 정신 차릴래나~

Creative Commons License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센스를 따릅니다. - 예외의 경우 빠리소년의 공지 참조

,